겨울방학맞이
전시장으로 떠난 세계 여행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내년 3월 15일까지 열리는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로버트 리먼 컬렉션'전에서 한 관람객이 메리 커샛의 초상화를 감상하고 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북적거리는 인파에 섞여 연말연시 기분 내기엔 도심을 포기할 수 없다. 추위 피하며 세계 여행하듯 해외 명화, 인기 작품, 명소를 만날 수 있는 서울 도심 전시장 여행은 어떨까. 인상주의부터 초기 모더니즘 작품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귀한 미술전, 세계 주요 도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낸 사진전, VR(가상현실) 체험으로 이집트 피라미드를 신나게 탐험하는 이색 체험전이 서울 곳곳에서 동시에 진행 중이다. 교통카드 한 장 들고 19세기 프랑스 그림에서 시작해 지중해 해변을 거쳐 피라미드까지, 시공간을 초월하는 세계 여행을 떠났다. 전시장 앞으로!
◇‘메트(MET)’ 대표작 81점 한자리에
“이번에 내리실 역”은 4호선·경의중앙선 이촌역이다. 올겨울 화제인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로버트 리먼 컬렉션’(~3월 15일, 이하 ‘메트전’)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에서 한창이다.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인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소장품 ‘로버트 리먼 컬렉션’(이하 리먼 컬렉션) 가운데 프랑스 인상주의부터 초기 모더니즘을 관통하는 회화·드로잉 등 65점을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전시다. 메트가 소장한 유럽 회화, 근현대 미술, 미국 미술, 드로잉과 판화 16점도 있다. 고흐·고갱·마티스·르누아르·세잔 등 한국 관람객에게 특히 사랑받거나 눈에 익은 인상주의 회화 위주로 엄선했다. 이번 전시에 앞서 맥스 홀라인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관장은 발간사를 통해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하 메트)의 인기 작품들은 원래 여러 전시장에 나뉘어 있지만, 이번 전시에선 특별히 한 장소에 모이게 됐다”며 “리먼 컬렉션의 작품들은 단일 대여조차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규모의 전시회를 기획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시도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메트전은 메트의 회화 작품이 대규모로 소개되는 국내 첫 전시여서 관심이 높다.
◇빛을 수집한 화가들의 시선을 따라
배우 이병헌이 참여한 오디오 가이드(대여료 3000원)를 들고 전시장으로 ‘체크인’ 하면 살바도르 달리(1904~1989)와 로버트 리먼(1891~1969)이 나눈 편지가 기다린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레이스를 뜨는 여인’(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모사작, 살바도르 달리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담긴 편지다. 리먼은 달리에게 ‘레이스를 뜨는 여인’을 모사해 주기를 의뢰했고, 달리는 흔쾌히 응했다. 편지는 2000여 점의 그림을 수집한 리먼 컬렉션의 단편을 보여준다.
'메트(MET)전'은 사조나 연대순으로 작품을 전시하는 대신 화가의 세계관이나 시선을 따라 전시하고 있다. 인간의 몸에서 출발해 인상주의의 출발점이 된 물과 빛까지 아우른다. 사진 속 작품은 명화 폴 고갱의 '목욕하는 타히티 여인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붉은 카펫과 벨벳 커튼이 드리운 프롤로그 공간과 1부 전시실은 리먼 가문의 타운하우스처럼 연출했다. 타운하우스는 리먼 가문의 소장품으로 채워진 공간. 방처럼 꾸민 1부 전시실에선 첫 번째 주제인 ‘더 인간다운, 몸’에 천착한 작품들이 맞이한다. 마치 베일을 벗은 듯 수줍은 포즈의 드로잉, 역동적인 몸짓의 누드화가 눈높이를 나란히 한다. 흐릿하게 표현한 폴 세잔의 초기작 ‘목욕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강렬한 색감의 폴 고갱의 ‘목욕하는 타히티 여인들’, 앙리 마티스의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앉은 여성’ 등 눈에 익은 명작 앞에선 관람객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전시는 인간의 몸을 시작으로 초상·자연·도시화·물 다섯 개의 주제로 나뉜다. 2부 ‘지금의 우리, 초상과 개성’에선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정밀한 초상화 대신 인상주의 화가 각자의 개성을 담아 자유롭게 표현한 초상화가 기다린다. 경직된 자세, 무표정한 얼굴과 안녕을 고하고 일상의 풍경과 어우러진 초상화는 찰나를 찍어낸 한 장의 사진 같다. 마치 빛이 어디에서 새어 들어온 듯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금발은 부스스하면서도 빛나고, ‘봄: 정원에 서 있는 마고’(메리 커샛)의 콧등엔 송골송골 땀이 맺힌 듯 반짝인다. 따스하고 밝은 느낌의 르누아르와 커샛의 작품은 여성과 어린이 관람객에게 특히 인기다. 지난 11일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를 감상하던 한 여성 관람객은 “태교에 좋다고 즐겨 보던 인상주의 원작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니, 믿을 수 없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커샛이 말년에 시력이 나빠진 상태에서 그린 ‘화장대 앞에 있는 드니즈’는 전성기에 그린 다른 두 작품과 나란히 전시돼 비교·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수풀이 우거진 아름다운 숲속을 배경으로 그네를 타며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피에르 오귀스트 코의 ‘봄’, 라이문도 데 마드라소 이 가레타의 ‘가면무도회 참석자들’을 전시한 공간은 감실처럼 연출해 두 남녀를 몰래 엿보는 것 같아 숨죽이게 된다. 프롤로그 속 편지와 이어지는 ‘레이스를 뜨는 여인’ 살바도르 달리 버전도 만날 수 있다.
◇그림 속 몽마르트르 대로, 해변으로
19세기 중반 이후 산업화로 도시의 공기 질이 나빠지고, 철도의 발달로 교외로 나가기가 쉬워지면서, 화가들은 작업실 대신 야외에서 숲을 직접 관찰하며 빛과 공기의 효과를 화폭에 옮기기 시작했다. 3부에 해당하는 ‘영원한 순간, 자연에서’부터는 관람객들도 작품을 통해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꽃 피는 과수원’에 갔다가 일몰 무렵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의 ‘오리가 있는 풍경’을 함께 바라본다. 르누아르의 ‘노르망디 바르제몽 근처의 바닷가’ 앞에선 어느새 사방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기분이다. 전시 해설을 맡은 도슨트는 ‘노르망디 바르제몽 근처의 바닷가’를 가리키며 “바닷물결과 바닷가 언덕에 있는 풀의 움직임까지 풍향·풍속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된 작품”이라며 “이런 디테일이 인상주의 그림을 읽는 재미”라고 설명했다. 눈이 올 듯한 날씨의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르 대로’(카미유 피사로)를 거닐다가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습작’(조르주 쇠라) 앞에선 폭신한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고 싶어지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메트전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첫 연작 중 하나인 '꽃 피는 과수원'도 볼 수 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풍경화엔 빛과 공기의 온도, 습도까지 느껴진다. 쥘 뒤프레의 '소 떼가 있는 리무쟁의 풍경' 속 하늘 한쪽에선 비 구름이 밀려올 것만 같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5부 ‘거울처럼 비치는, 물결 속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물과 빛, ‘인상’을 돌아보는 작품들이 마침표를 찍는다. 특히 5점의 작품은 해변의 만과 같은 곡선형 푸른색 벽에 전시해 마치 바닷가를 거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덕분에 피에르 보나르의 ‘오래된 항구 생트로페의 풍경’ 속 소박한 바닷가 마을에선 골목 사이로 비릿한 바다 냄새가 밀려오는 듯하고, 윤슬이 반짝거리는 알베르 마르케의 ‘햇빛을 받는 알제리의 부지 항구’를 감상하다 보면 몽롱해진다. 관람 위치, 보는 방향에 따라 미묘하게 색감 차이가 나는 것을 몸을 이리저리 틀며 보는 관람객들의 모습도 재미있다.
전시장 사이의 영상 공간은 작품 외 또 하나의 볼거리다. 리먼 가문 컬렉션 역사와 기증한 사연을 정리한 영상은 1부와 2부 사이에, 자연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조명과 영상으로 연출한 영상은 2부와 3부 사이에 있다. “벽지보다 못하다”는 ‘조롱’으로 출발한 인상주의 첫 전시회부터 19세기 후반 빛을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실험과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야기 영상은 전시 끝에 여운을 남긴다. 오디오 가이드 외 전시에 관한 정규 해설은 평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 주말 오전 11시에 진행한다. 새해 첫날과 설날 당일에는 휴관하며 관람료는 성인 1만9000원·청소년 1만6000원·어린이 1만1000원·유아 7000원. 수험생 및 야간 개장 할인은 국중박 홈페이지 확인.
변화무쌍한 날씨를 조명과 영상으로 연출한 영상도 볼거리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벽지보다 못하다"는 조롱을 받으며 시작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실감 영상관. 감동과 여운을 끝으로 '메트전'은 마침표를 찍는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지중해의 여름, 피라미드 안으로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눈에 비친 도시, 근교, 자연에서 체크아웃하고 이어가 볼 곳은 스페인의 해변이다. 1·4호선 서울역 4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이내에 있는 ‘그라운드시소 센트럴’에선 ‘요시고 사진전2: 끝나지 않은 여행’(~3월 2일)이 기다린다.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출신의 요시고(본명 호세 하비에르 세라노)는 무명이던 지난 2021년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요시고 사진전: 따뜻한 휴일의 기록’을 통해 국내에 데뷔전을 치르고서 부산·도쿄까지 이어져 60만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스타덤에 오른 포토그래퍼다. 특히 피사체에 따라 빛을 다루는 방식을 달리해 개성 있는 사진 언어를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 속으로 빠져드는 듯 터널 형태로 깊이감을 살린 '요시고 사진전2: 끝나지 않은 여행'의 전시 공간.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요시고 사진전2: 끝나지 않은 여행'에선 지중해뿐 아니라 크루즈를 거쳐 도쿄, 서울, 뉴욕 등 세계 대도시를 담은 사진도 볼 수 있다. 프레임을 너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어느 도시로 순간 이동해 창 밖 풍경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3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 역시 대표작인 지중해의 바다와 해변 풍경에서 시작된다. 1부인 ‘홀리데이 메모리즈’는 파도 너머 여유롭고 평온하게 해변을 즐기는 사람들의 풍경이, 2부 ‘클로즈 투 더 워터’는 물을 주제로 보다 역동적인 몸짓을 담아냈다. 3부는 크루즈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발견해낸 깨알 같은 풍경에 작가 특유의 위트를 담아냈다. 감각적인 색감의 크루즈에서 빠져나오면 별안간 ‘도쿄’의 어느 지하철 안이다. 지하철 안내 방송과 네모난 액자 너머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선은 서울에서 다시 뉴욕의 밤거리로 이끈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유리의 도시’ 속 퀸의 여정을 따라가며 담아낸 요시고만의 찰나의 기록엔 대도시의 소음 속 고독감이 배어 있다. 이후 미 서부의 로드 트립까지 요시고의 세계 여행 기록은 마무리된다. 전시 기간 휴무 없이 운영하며, 관람료는 1인 2만원.
착공 20년 만에 문을 연 이집트 대박물관(GEM·Grand Egyptian Museum)이 주목받는 가운데, 서울 한복판에서 하는 이집트 피라미드 여행은 어떨까. 4·6호선 삼각지에서 도보 3~5분 거리의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로의 여행’(~3월 2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히는 ‘기자 피라미드’를 VR 기술로 생생하게 탐험할 수 있는 몰입형 체험전이다. 관람객은 45분 동안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전시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가상현실 속 이집트 학자 모나와 함께 4500년 전 고대 이집트로 시간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피라미드 내부는 물론이고 나일강의 장례식 장면까지 VR을 통해 가보거나 체험해볼 수 있어 어린이나 청소년뿐 아니라 젊은 커플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 날 휴관. 관람료는 2만~3만원. 두 전시 모두 메트전이 열리는 국중박과 가까이 있어 코스를 잘 짜면 전시만으로 한나절 꽉 찬 세계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박근희여행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