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왜 공포를 유발하나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 9월 한 컨퍼런스에서 발언하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
오는 18~19일 열리는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결정 회의에서 금리 인상 가능성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로 인해 일본발(發) 시장 충격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와 ‘폭락’ 가능성은 작다는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소시에테제네랄의 마니시 카브라 주식 전략가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최근 “일본은행의 긴축은 미국 연방준비제도나 미 정부의 정책 변화보다 주식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경고했다.
일본은행의 금리 결정에 세계가 더 숨죽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중심엔 장기간 낮은 금리가 지속된 일본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세계 각지에 투자하는 이른바 ‘엔 캐리 트레이드’가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의 실체는 무엇이고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지금 상황을 진짜 두려워해야 할까.
◇엔 캐리 트레이드가 뭔가
직역하면 들고 가서(carry) 투자한다(trade)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캐리 트레이드(carry trade)’를 “저금리 국가의 통화로 차입해서 고금리 국가의 통화로 환전한 후 해당 국가에 투자하는 행위 혹은 그러한 투자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엔 캐리 트레이드’란 금리가 낮은 일본의 엔으로 돈을 빌려서 금리가 비교적 높은 미국 같은 나라의 통화로 환전해 투자하는 것을 뜻한다. 장기 저성장·저물가를 겪은 일본의 기준금리는 1996년 이후 사실상 0%대를 유지해 왔고 심지어 2016년부터 지난해 초까지는 초유의 ‘마이너스 금리’까지 갔었다. 이런 초저금리가 이어지면서 엔화를 빌려 해외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은 꾸준히 늘어왔다.
다만 금리 차를 공략한다고 해서 무조건 돈을 벌 수 있지는 않다. 윤경수 한국은행 국제국장은 지난해 9월 한은 블로그에 쓴 글에서 “실제로 캐리 트레이드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간단치가 않다”며 “캐리 트레이드의 실현 수익률은 투자 자산 자체의 수익률뿐 아니라 환율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아래는 윤 국장의 블로그 설명이다.
“예를 들어 장기간 초저금리를 유지해온 일본에서 엔화를 0% 이자율로 차입해 미 달러화로 환전(1달러=160엔 환율 가정)한 후 미국 소재 은행에 5% 이자로 예치하는 캐리 트레이드를 상정해보자. 만기에도 환율이 동일하다면 이 투자자는 5% 이익을 얻게 된다. 이와 달리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5% 낮아지는 경우(1달러=152엔) 이익이 모두 사라진다. 적어도 환율의 하락률이 양국 간 금리 차에는 미치지 못해야 수익이 생기며, 거래 당시 환율보다 상승하는 경우는 금리 차보다 높은 수익률을 성취하게 된다. 따라서 캐리 트레이드의 실현 수익률은 투자 자산 자체의 수익률뿐 아니라 환율 움직임과 일대일 관계에 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가 얼마나 되나
캐리 트레이드는 주식·채권 투자뿐 아니라 외환 파생상품을 통한 거래도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규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은 보고서에 따르면 일단 외환 파생상품 거래를 통한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는 지난해 기준 약 1600억달러로 추정된다.
아울러 엔화 차입을 한 후 더 높은 금리의 자산에 투자하는 전통적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는 금융사들의 엔화 대출로 추산해볼 수 있다. 일본 소재 외국은행 지점의 국외 본점에 대한 엔화 대출은 2024년 3월말 약 14조엔, 글로벌 대형은행들이 일본을 제외한 국가의 비은행부문에 대출한 엔화 자금 규모는 약 40조엔으로 파악됐다. 한국 ‘서학개미(해외에 투자하는 한국인)’의 일본판인 이른바 ‘와타나베 부인’ 등 일본의 개인 투자자가 해외에 투자한 주식·채권 투자 자금이 2001년 이후 누적 460조엔 규모라는 추산 결과도 있다. 최근엔 일본은행 기준금리 인상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비트코인 등 가상 화폐 가격이 급락했는데, 이를 두고 엔 캐리 트레이드의 영향의 가상 화폐 시장까지 영향을 끼쳐왔다는 의견도 나온다.
다만 이런 자금들이 모두 금리차를 노리고 투자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분석 기관에 따라 엔 캐리 트레이드 추정액은 큰 편차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FT는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의 규모에 대해선 수천억에서 수조달러까지, 분석 기관마다 매우 다른 추정치가 존재한다”고 전했다.
일본인의 해외 투자 규모를 가늠할 지표 중엔 국제통화기금(IMF) 기준에 따라 각국이 집계하는 ‘국제투자대조표’도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인의 해외 증권(주식·채권) 투자 잔액은 개인·기관을 포함해 지난 3분기 말 기준 4조9000억달러 정도였다. 같은 시점 한국인의 투자금은 약 1조2000억달러다. 한국인의 해외 투자가 늘었다고 해도, 여전히 일본인의 해외 투자 규모가 4배 수준 정도 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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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엔 캐리 트레이드가 최근 들어 화제인가
일본은행이 18~19일 기준금리 결정 회의에서 금리를 올리겠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기 때문이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최근 “금리를 높인다 해도 여전히 완화적인 금융 환경 속에서 조정되는 것으로 경기를 저해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발언 등을 하면서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우에다 총재는 금리 인상 전에 시장에 충분히 사전 신호를 주겠다고 해왔기 때문에 이런 발언이 12월 금리 인상에 대한 예고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일본 언론에서 “기준금리 결정 회의에 참가하는 위원 아홉 명 가운데 다섯 명 이상이 기준금리 인상을 지지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점도 인상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일본 금리 선물 시장을 통해 추산한 12월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은 11월 말까지만 해도 8%였는데 최근 80%까지 올라갔다.
일본 금리가 상승하면 환율 변동 위험을 감수해 가며 다른 나라에 투자해 얻을 수 있는 기대 수익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엔 캐리 트레이드를 청산하려는 이들이 늘고, 그 과정에서 글로벌 금융 시장에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도 있었나
일본은행은 2006년 4월 기준금리를 올리고 나서 줄곧 동결하거나 인하하다가 약 18년이 지난 지난해 3월 기준금리를 약간 올렸다. 그래 봤자 ‘마이너스’를 정리하고 사실상 0% 정도로 올렸기 때문에 큰 충격은 없었다. 글로벌 시장에 본격적인 영향은 지난해 7월 31일 연 0.25%로 금리를 인상한 후 발생했다. 당시 일본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추가 인상까지 시사하자 글로벌 금융 시장에 단기적인 충격이 발생했다.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후 아시아 증시가 급락했던 2024년 8월 4일 한국, 일본, 대만의 주요 증시 하락률. /그래픽=양인성 |
일본으로 엔 캐리 트레이드를 청산한 자금이 돌아옴에 따라 엔화 수요가 늘며 엔화 가치가 급등하고(달러 대비 엔화 환율 급락) 미국 증시 등 세계 주식 시장이 동반 하락했다. 일본은행의 기준 금리 인상 직후인 8월 4일 발생한 동시다발적 주식시장 급락은 ‘블랙 먼데이’로 불리며 기술주 위주 폭락으로 이어졌다. 한국 코스피도 하루 사이 8.8% 폭락했다. 긴축 우려에 엔화 가치가 가파르게 치솟아 일본 수출 기업 실적 악화 우려가 번지고 일본 증시가 하루 만에 12.4% 폭락하는 등 일본에도 큰 충격이 발생했다. ‘발작’ 수준의 시장 혼돈은 일본은행이 한 주 만에 “추가 인상은 없다”고 ‘백기 투항’하고 나서야 진정됐다.
◇이번엔 어떻게 될까
의견은 엇갈린다. 일단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이미 일본 국채 금리는 상승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채 금리 상승은 단기적으로는 국채 유통 가격 하락을 의미하지만, 국채를 만기까지 보유할 각오가 되어 있는 장기 투자자나 기관 투자자엔 해외 자산을 팔고 안전하면서도 금리가 높은 일본 국채를 살 이유가 된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피델리티의 마이클 리델 매니저는 FT에 “일본 국채 금리 상승은 일본 투자자들이 해외 자산을 팔고 자금을 일본으로 환수할 유인”이라며 “일본 금리 인상 효과는 전 세계로 빠르게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카브라 소시에테제네럴 주식전략가는 일본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1%포인트 상승할 경우 미국 S&P500 지수가 10~12%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은행 건물 위에 일본 국기가 휘날리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
다만 지난해에 버금갈 큰 충격이 발생할 가능성은 작다는 전망도 나온다. 류진이 KB증권 연구원은 “일본은행의 완만한 금리 인상이 진행되는 과정에 지난해같은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의 급격한 충격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한다”며 “2024년엔 미국 경기 침체 우려, 일본은행의 양적 긴축 발표, 일본은행 총재의 매파적 기자회견 발언이 겹치며 변동성이 확대된 특수한 환경이었다”라고 했다. 문남중 대신증권 연구원은 “일본은행 총재는 12월 기준금리 인상에 대해 금융시장과 사전 소통을 해왔고, 향후 금리 인상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혹시 발생할 수 있는 금융시장 혼란을 막기 위해 점진적인 금리 인상 행보를 보일 전망”이라며 “12월 기준금리를 인상하더라도 급격한 엔화 강세와 증시 하락 등 금융시장 혼란은 제한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전망했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8개월 만에 장중 1480원을 돌파한 17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모니터에 환율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뉴시스 |
일본 기준금리 상승으로 엔화 가치가 오를 경우 원화 가치도 따라 상승하면서 9월 이후 달러당 1400원 위에 머물고 있는 환율이 다소 진정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최근 들어 원화 가치가 엔화를 따라가는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한국 원화의 가치 하락이 글로벌 요인보다는 한국 개인·기관의 해외 투자 증가, 외국인 투자자의 한국 주식 매도, 한국 수출 기업들의 소극적인 달러 매도, 대미 투자금 확대에 대한 불안감 등 글로벌 요인이 아닌 ‘한국적 특성’에 기인한 측면이 크기 때문에 일본 기준금리 인상으로 고환율이 진정되기는 무리라는 시각도 있다.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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