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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35년에도 동·서독 경제 격차… ‘2등 국민들’ 극우정당에 쏠린다

조선일보 조귀동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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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35년에도 동·서독 경제 격차… ‘2등 국민들’ 극우정당에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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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신화가 저문다] [④·끝] 통일 후유증 여전한 독일

동·서 연봉 격차 2000만원 넘어
500대 기업 중 8.4%만 동독에
극우정당, 동독서 압도적 득표
동독인 43% “2등 국민” 한탄
독일 동남부에 있는 폴크스바겐의 츠비카우 공장은 옛 동독과 서독 지역 간 끝나지 않은 갈등의 상징이다. 아우디의 태동지이자 동독 시절 국민차 트라반트를 생산하던 곳이다. 폴크스바겐은 폴로·골프·파사트 같은 중소형차를 만들다, 2020년 야심 차게 전기차 공장으로 바꿨다. 그러나 지난해 대규모 구조 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츠비카우가 맡고 있던 ID.3와 ID.4 생산을 볼프스부르크·엠덴 등 서독 지역 공장으로 넘기고, 아우디 Q4 이트론만 남긴다는 결정이었다.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2년 연속 역성장… 동독부터 무너진다

츠비카우 공장 근로자 마르틴 레만은 프랑스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CEO는 한 번도 츠비카우에 오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비용 절감만 생각한다”고 분개했다. 이 말에는 서독 기업이 ‘2등 국민’인 동독인을 희생양 삼는다는 뿌리 깊은 불신이 담겨 있다. 2대 주주(의결권 20%)인 서독 니더작센주 정부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안, 츠비카우가 속한 작센주 정부는 철저히 배제됐다. 지역 언론 프라이에프레세는 “또 동독은 소외되는 것인가”라며 한탄했다. 서독 엘리트 중심의 구조 속에서 자신들이 겪는 차별에 대한 고발이다. 폴크스바겐이 최근 동독 지역 드레스덴의 공장도 폐쇄하며 불신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통일 이후 35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독일은 동·서 갈등으로 신음하고 있다. 독일 경제가 2023~2024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침체에 빠져 있는 가운데 동·서 갈등이 다시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자동차·화학 등 주력 산업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제조업 공장만 있는 동독 지역이 상대적으로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동독은 구조조정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외되고, 첨단·서비스업 일자리가 부족해 제조업 쇠락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또 젊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면서 심각한 ‘남초 현상’이 빚어지고, 공동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다. 이민자까지 대거 유입되자 어려움은 가중됐다.

동독 군인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며 탈출하고 있다.

동독 군인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며 탈출하고 있다.


◇동독 급여 수준, 서독의 79%에 그쳐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동·서독 간 근로자 1인당 평균 임금 차이는 2023년 1만2775유로에서 2024년 1만3374유로(약 2300만원)로 더 커졌다. 지난해 서독 근로자가 6만3999유로를 벌 때 동독 근로자는 5만625유로를 벌었다. 월급쟁이 소득으로 동독이 서독의 79%에 그친다는 얘기다. 실업률은 동독 지역 8.2%, 서독 지역 6.1%다. 독일경제연구소(IFO)는 임금 격차의 3분의 2는 산업·기업 규모·직종 등 노동시장의 구조적 특징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500대 기업 가운데 동독 지역에 본사가 있는 회사는 42곳(8.4%)에 불과하고, 독일 주가지수인 DAX40를 구성하는 40개 주요 기업 가운데는 한 곳도 없다.

일자리가 공장 생산직밖에 없으니 젊은 여성들은 서독 지역으로 떠나갔다. 18~29세에서 여성 100명당 남성 수는 동독 지역인 작센-안할트주 116.5명, 브란덴부르크주 116.3명, 튀링겐주 115.9명으로 서독 지역보다 월등하게 남초(男超)다. 젊은 남성들은 연애와 결혼에서 소외되고, 인구 유출로 도시가 쇠락하면서 ‘버려진 지역에 살고 있다’는 좌절감을 갖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민자 유입은 저렴한 주택 부족과 임대료 급등을 야기하며, 기존 중하층 동독 주민들에게 사회경제적 부담을 전가하는 도화선이 됐다.

◇동독 지역은 극우 정당이 지지율 1위

이런 현실은 ‘2등 국민’이라는 굴욕적 인식으로 이어졌다. 2023년 여론조사에서 동독인 43%가 자신을 ‘2등 국민’이라 느낀다고 답했다. 40%는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인이 아닌 동독인이라고 했다. 이 깊어진 불만과 소외감은 극우 정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정치적 분노로 폭발했다. 지난 2월 총선에서 극우 정당 ‘독일을위한대안(AfD)’은 동독 지역 5개 주에서 36.2%를 얻어 전통적인 양대 정당인 기민·기사당 연합(18.9%)과 사민당(10.8%)을 압도했다. 극좌 ‘자라바겐크네히트동맹(BSW)’도 10.0%를 얻으며 세를 확장했다. “독일이여, 일어서라”며 서독 엘리트 중심의 정치판을 갈아엎자고 외치는 세력들이 이제 동독 정치의 ‘주류’가 된 셈이다.


독일 브란덴부르크 미헨도르프(Michendorf) 기차역 앞에 내걸린 극우 성향 ‘독일을위한대안당’(AfD)의 선거 포스터. 포스터엔 빌리 브란트 전(前) 독일 총리의 모토인 ‘보다 많은 민주주의에의 도전(mehr Demokratie wagen)’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경제적으로 낙후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옛 동독 지역에선 AfD의 지지율이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당을 앞서는 상황이다.

독일 브란덴부르크 미헨도르프(Michendorf) 기차역 앞에 내걸린 극우 성향 ‘독일을위한대안당’(AfD)의 선거 포스터. 포스터엔 빌리 브란트 전(前) 독일 총리의 모토인 ‘보다 많은 민주주의에의 도전(mehr Demokratie wagen)’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경제적으로 낙후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옛 동독 지역에선 AfD의 지지율이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당을 앞서는 상황이다.


기업 77%가 팩스 사용… “디지털 개발도상국” 자조

독일은 일본 못지않게 여전히 팩스, 서명, 종이로 돌아가는 ‘아날로그 사회’다. 독일 디지털협회(Bitkom)에 따르면 무려 77%의 기업이 팩스를 쓴다. 이메일이나 전자 문서는 기피된다. 종이로 인쇄돼 있거나 팩스로 전송된 서류만 법적 효력을 인정받기 때문에 기업이 팩스를 포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일상생활에도 여전히 아날로그 관행이 남아 있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려면 계약서를 인쇄해 우체국에 가야 한다. 그러면 우체국 직원이 신분증을 확인한 뒤 서류를 봉투에 넣어 은행으로 보낸다. 결제 건수로 볼 때 현금(51%)이 직불카드(27%), 신용카드(6%), 모바일 결제(6%)보다 더 많이 쓰이는 나라가 독일이다. 지난해 도입한 전자 처방전의 경우 QR코드로 인쇄해 환자가 약국에 들고 가야 한다.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80%가 매일 자필 서명을 할 정도다. 정치권, 언론, 기업 모두 ‘디지털 개발도상국(Digitales Entwicklungsland)’이라고 자조하며 탈(脫)아날로그를 요구하지만 변화는 요원하다.

독일의 인터넷 속도는 세계 59위(101.1Mbps·스피드테스트닷넷)로 EU 회원국 중 이탈리아(104.0Mbps·57위), 크로아티아(79.9Mbps·62위)와 하위권을 다툰다. 광케이블 보급률은 36.8%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구리선을 쓴다. 대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인터넷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이동통신도 제대로 터지지 않는 곳이 많다.


디지털 혁신을 이끄는 건 B2B(기업 간 거래) 분야나 제조업이다. 대기업으로 성장한 IT 기업이 적고, 플랫폼 등 서비스 분야에서는 존재감이 없다. 무역투자조합(GTAI)은 최근 보고서에서 AI 분야도 자동차·산업용 로봇 등 기존 기업들이 잘하는 분야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진단했다. 양질의 데이터를 찾기 어렵고, 클라우드 인프라가 척박하다.

뮌헨 시민 소득 42%가 월세, 주택 공급 더뎌 주거난 심각

임차료 상승에 항의하는 베를린 시민들이 ‘이익 대신 주민을 위한 생활 공간’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임차료 상승에 항의하는 베를린 시민들이 ‘이익 대신 주민을 위한 생활 공간’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독일 대도시에는 몇 년간 개발되지 않고 방치된 땅이 꽤 많다. 이중 삼중 규제와 높은 건설비를 감당해 주택을 짓느니, 부동산 호경기에 되파는 게 이득이라서다. 함부르크의 홀스텐 맥주 공장 부지가 대표적이다. 2016년 칼스버그가 부동산 회사 제르치에 매각한 뒤, 제대로 된 개발은 이뤄지지 않고 몇 차례 손바뀜만 있었다. 최대 2000채를 지을 수 있는 노른자위 땅이 계속 방치되다 올 10월 시 당국이 한 투자사와 함께 되사들였다. 뒤셀도르프 중앙역의 금싸라기 땅도 7년 동안 흉물로 남아 있다.

연방 정부의 주택 공급 목표는 연 40만채. 하지만 지난해 주택 허가 건수는 21만6000건에 불과했다. 매년 10만채씩 부족분이 쌓여간다는 분석도 있다. 독일부동산연맹(ZIA)은 최근 보고서에서 “저소득층용 임대주택은 물론, 중산층을 위한 집조차 지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2022년부터 급등한 인건비와 자재비는 임대료 원가를 치솟게 했고, 여기에 환경 규제, 임대료 인상 제한까지 더해지니 건설업계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자체도 저렴한 주택 공급에 소극적이다. 기반 시설 확충과 사회 복지 지출만 늘 뿐 세수는 늘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3분기 베를린, 뮌헨,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월세는 2023년 대비 각각 9.4%, 10.6%, 9.0%씩 올랐다. 주요 대도시에서 신규 주택 월세는 기존 주택보다 평균 48%나 더 높다. 뮌헨 시민들은 소득의 42%를, 베를린 시민들은 35%를 월세로 쓰는 실정이다. 저소득층은 물론 중산층 가계에도 큰 부담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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