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북한의 한국인 억류 뿌리는 6·25 전시 민간인 납북"

조선일보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원문보기

“북한의 한국인 억류 뿌리는 6·25 전시 민간인 납북"

서울맑음 / -1.3 °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89회>]

이 대통령, 북한 억류 한국 국민 “처음 듣는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회 즉각 반발하며 비판
“억장이 무너진다. 전시 납북자는 알고 있는가”
135cm 척추 장애인 이미일씨가 이끌며 공론화
“납북자 대책팀대통령 직속으로 만들어야”
2011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전시 납북자 체험 걷기 행사에서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이미일 이사장(가운데 키 작은 인물)이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과 함께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2011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전시 납북자 체험 걷기 행사에서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이미일 이사장(가운데 키 작은 인물)이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과 함께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북한 김정은 정권이 우리 국민을 억류 중이라는 데 대해 “처음 듣는 얘기”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지난 3일 외신 기자 간담회에서였습니다.

이날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NK뉴스’의 채드 오캐럴 기자는 김정욱·김국기·최춘길 선교사 등이 2015년 북한에서 노동교화형이 선고된 후 억류돼 있다며,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을 바라보며 “한국 국민이 잡혀 있다는 게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위 실장에게 “언제, 어떤 경위로 잡혔느냐”고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오캐럴 기자는 “대통령이 모르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고 반응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에 억류 중인 사실조차 대통령이 모른다는 언급은 납북자 가족과 관련 단체들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줬습니다. 김정은 정권하에서 비교적 최근에 억류된 우리 국민의 존재조차 대통령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전시·전후 납북자 문제에 대한 정부의 인식은 과연 어떻겠느냐는 겁니다. 북한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 행위를 해결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비판도 뒤따릅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분노, 비통함느낀다”

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가장 강하게 반발하며 성명을 낸 단체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입니다. 가족회는 다음 날인 4일 발표한 성명에서 “(북한에 억류된 한국 국민에 대해) ‘처음 듣는 얘기’라며 어리둥절해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지는 비통함과 분노를 느낀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북한에 억류된 우리 국민과 전시 납북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대응이 여전히 안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지난 3일 외신기자간담회에서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NK뉴스’의 채드 오캐럴 기자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대책을 이재명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해  “처음 듣는 얘기”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TV 조선

지난 3일 외신기자간담회에서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NK뉴스’의 채드 오캐럴 기자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대책을 이재명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해 “처음 듣는 얘기”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TV 조선


가족회는 또 “(외국인) 기자가 언급한 북한 억류 사례는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비교적 최근 사례이며, 그 뿌리는 6·25전쟁 중 발생한 10만여 명 민간인 강제 납북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75년 동안 수없이 많은 남북 회담이 있었지만, 납북된 우리 가족 중 단 한 분도 송환은커녕 생사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며 “불과 10여 년 전 사건조차 ‘오래전 일이라 알지 못한다’는 식의 인식이 계속된다면, 75년 된 전시 납북 문제를 정부가 얼마나 제대로 인식하고 있겠느냐”고 반문습니다.

2000년 ‘2기’ 가족회 활동 재개

저는 워싱턴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2011년부터 이 단체를 취재해 왔습니다. 당시 가족회의 이사장은 키 135㎝의 척추 장애인 이미일 씨(62)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성환 씨는 1950년 9월 북한군에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미일 이사장은 두 살 때 유모의 실수로 댓돌에 떨어져 척추를 다쳤고, 이후 결핵균 감염까지 겹쳐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는 1971년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결혼했지만, 장애로 인한 삶의 제약과 사회적 편견 속에서 1987년 이혼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전시 납북자 문제에 본격적으로 나선 결정적인 계기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입니다.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전후 납북자 문제는 비교적 언론의 관심을 받았지만, 전시 납북자 문제는 외면받았습니다. 미일 이사장은 “그때만 해도 훌륭한 분이 많으니 누군가는 나설 줄 알았다. 그런데 모두들 쥐 죽은 듯이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몸도 부실한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8만명이 북한에 잡혀갔는데 왜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가만히 있느냐는 단순한 문제 제기였다”고 했습니다.

이미일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이 2011년 전시 납북자 8만여 명을 포함, 일본·루마니아 등 12개국에서 납북된 이들의 생사 확인 및 송환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미 의회에 통과시켜 납북자 문제를 세계적으로 공론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조선일보

이미일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이 2011년 전시 납북자 8만여 명을 포함, 일본·루마니아 등 12개국에서 납북된 이들의 생사 확인 및 송환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미 의회에 통과시켜 납북자 문제를 세계적으로 공론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조선일보


가족회는 원래 1951년 8월 전쟁 중 부산에서 ‘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 창립 총회를 열며 출범했고, 같은 해 9월 공보처에 사회단체로 등록됐습니다. 이후 1953년 ‘한국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로 이어졌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실상 활동이 중단됐습니다. 장기간의 공백 끝에 2000년 11월 통일부 산하 사단법인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로 등록하며 2기 활동을 시작습니다. 이어 2005년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을 개원하면서 자료 축적과 기록 사업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전시 납북자법 위해 ‘군 사령부처럼’ 움직여

이 이사장은 특히 전시 납북자 특별법 통과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법 통과를 위해 사무실을 ‘군 사령부’처럼 운영했다”고 했습니다. 사무실 벽에 국회의원들의 이름과 지역구를 적어 붙였고, 각 지역에 가족회 회원이 누가 있는지 파악해 해당 의원을 찾아가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16·17대 국회에서 잇따라 폐기됐던 납북자 관련 법안은 18대 국회에서 다시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가족회 활동에 공감한 김무성·박선영 의원 등이 ‘한국전쟁 납북 피해 진상 규명 및 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안’을 각각 발의했습니다. 이어 2월 27일 두 의원 공동 주최로 ‘6·25 전시 납북자 진상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 공청회’가 열려 가족회 회원 등 6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법안은 모두 89명의 의원이 서명했는데, 당시 민주당의 김진표·송민순 의원은 “이건 꼭 해야 한다”며 지지했습니다. 이 법안은 2010년 3월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국가에 대한 원망보다 감사”

그로부터 1년 5개월이 흐른 뒤인 2011년 8월 2일, 전시 납북자 55명이 정부 인정을 받은 후 이미일 이사장은 김황식 총리가 주재한 회의에서 “감사하다”는 말부터 꺼냈습니다. 10년간의 노력 끝에 8만2959명으로 추산되는 납북자 가운데 겨우 55명만이 정부 인정을 받았을 뿐이지만,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오늘의 번영과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60년이 넘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전쟁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를 보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도 가집니다. 대한민국을 지지했던 것 때문에 납북돼 희생되신 분들도 이제는 눈물을 거두고 위로를 받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본사 편집국을 찾은 이 이사장에게 왜 ‘대한민국에 감사’부터 언급했는지 물었습니다.


— 정부가 그동안 해준 것이 없는데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가.

“어릴 때 몸을 다쳐서 교회와 기도원에 많이 다녔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이 잘되기를 항상 기도해 왔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가고 싶던 경기여중, 이화여중에도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납북되고…. 그래도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불쌍해 보였다. 정부가 그동안 이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싶었다. 그동안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정부를 몰아세우고 쓴소리를 해 댄 것은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 이제 와서 전시 납북자 문제를 꺼내는 이유는.

“1945년 8·15 광복도 중요하지만, 1948년의 건국이 더 중요하다. 전시 납북자들은 건국 후 대한민국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생긴 희생자들이다. 이제는 한국이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같은 나라가 아니다. 당시 정계·의료계·경제계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던 분들이 많이 잡혀갔다. 그동안은 우리가 먹고살기 바빠서, 힘이 없어서 전쟁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그분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일을 할 때다. 그게 국가가 할 일이다.”


“가녀린 여자와 아이들 붙잡고 도대체 뭐 하나”

제가 “납북자 문제가 전면에 제기되면 대북 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고 하자, 그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부와 여유를 누리고 사는데, 이런 좋은 세상을 못 보고 북에 억류된 이가 8만명을 넘는다. 그분들을 역사에 기록도 안 하고 간다는 것은 패배 의식이다.” 이어 “정부가 지금은 북한으로부터 수비하느라 바쁘지만, 북한의 납북 범죄를 국제사회에 제기해 ‘북한은 범죄자’라고 압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날은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의 방한을 계기로, 북한에 억류 중인 오길남 씨 가족을 구출하자는 ‘통영의 딸을 구해 주세요’라는 전면 광고가 신문에 실린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쟁 납북자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면, 오길남 씨 가족이 겪은 비극이 과연 벌어졌겠느냐”며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북한의 납치 문제가 널리 알려졌다면, 북한이 어부나 학생을 납치할 생각을 쉽게 못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김정일은 가녀린 여자와 아이들을 붙잡고 도대체 뭐 하자는 것인가요”라고 일갈했습니다.

‘목소리가 탁하고 장애인이라서’ TV 인터뷰 거부당하기도

이 이사장은 가족회 운영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 초기에는 대부분 자신이 충당해야만 했습니다. “단체를 시작한 뒤 2011년에 처음으로 정부에서 1억원을 받았다. 모두 사업비다. 주변에서는 정부에 돈을 더 달라고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 나랏돈이 어떤 돈인데, 내 돈보다 더 소중하고 끔찍한 돈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땅에 지은 작은 빌딩의 임대 수입에서 한 달에 1000만원씩 털어 직원들 월급을 준다. 납북자 일이 주업이고, 건물 관리는 부업이다.”

그는 가족회 활동을 하면서 장애와 탁한 목소리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 공중파 방송에서 취재하는데 장애인이라서 못 하겠다고 하더라. 목소리도 탁해서 듣기 좋지 않다고 하더라. 나를 바로 앞에 두고…. 이럴 때 내가 장애인이 아니고 외모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납북자 대책팀을 왜 이산가족납북자과로 흡수하나”

이미일 이사장의 건강이 좋지 않아지면서 가족회는 2023년부터 이성의 이사장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성의 이사장은 12일 전화 통화에서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납북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까 걱정했습니다. 특히 통일부 조직 개편으로 장관 직속 납북자대책팀이 ‘이산가족납북자과’로 흡수된 점을 우려했습니다.

이성의 이사장은 “(납북자대책팀 통폐합은) 납치·억류 문제를 이산가족 문제로 희석하는 조치”라며 “이번 외신 간담회 논란은 현 정부의 납북·억류 문제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외교부·통일부 장관의 공식 사과,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문제를 전담하는 부서를 대통령 직속으로 신설, 공무원의 ‘물망초’ 배지 착용(납북 및 억류 피해자 추모 상징)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6·25전쟁 당시 군·경에 의한 피해는 배상이 이뤄지는 반면, 납북 피해자 가족에는 사실상 아무런 지원이 없는 현실이 시정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전시·전후 납북자 문제가 더 널리 알려지고, 가족회의 숙원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