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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족적 샌들 감정… 21년 미제 사건, 다시 미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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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족적 샌들 감정… 21년 미제 사건, 다시 미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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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영월 농민회 살인 사건
검, 경 "범행 저지르고 알리바이 만들었다"
1심 무기징역, 2심 무죄, 대법원 무죄 확정
"충분할 만큼 증명이 되지 않았다고 판단"


20년 전 영월 농민회 간부 피살 사건 피고인 A씨가 지난해 6월 28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앞서 춘천지검 영월지청 현관에서 취재진에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20년 전 영월 농민회 간부 피살 사건 피고인 A씨가 지난해 6월 28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앞서 춘천지검 영월지청 현관에서 취재진에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강원도 영월 농민회 간사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피고인이 무죄를 확정받았다. 과학수사를 바탕으로 21년 만에 실마리가 풀린 듯 보였던 미제사건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됐다.

대법원 3부(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11일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영월 농민회 간사 살인 사건은 2004년 8월 영월읍 농민회 사무실에서 벌어졌다. 당시 모 영농조합법인 간사 B씨가 흉기로 목과 배 등을 10여 차례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최초 A씨를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벌였으나, A씨가 "사건 당일 미사리 계곡에 있었다"며 물놀이 사진을 제출해 용의 선상에서 벗어났다.

미제로 남았던 사건은 2014년 강원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이 사실상 재수사에 들어가면서 실마리가 풀리는 듯 보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2020년 11월 "피살 장소에서 확보한 피 묻은 신발(샌들)과 A씨의 족적, 마모흔 등 17개 특징점이 99.9% 일치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사건을 넘겨 받은 검찰은 기지국 통신내역 등을 분석해 사건 당일 A씨가 물놀이 중 "술을 사오겠다"며 계곡을 나와 차량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범행 장소로 이동했다고 판단, 그를 지난해 7월 17일 구속기소했다. 검경은 A씨가 사건 무렵 교제 중이던 30대 여성이 B씨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고, 알리바이도 따로 만들었다고 결론냈다.

1심은 A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현장에 남은 동일 신발에 의한 다수의 족적과 피해자 혈흔 위치, 형태 등 복합적 분석을 통해 샌들 족적을 남긴 사람이 범인으로 강하게 추정된다"며 "다른 사람이 몰래 피고인의 샌들을 신고 범행했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고 족적이 우연일 확률은 제로(0)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은 수사기관에 샌들을 제출하는 과정에서 바꿔치기를 하려거나 돌려받은 샌들을 즉시 폐기하는 수상한 행동을 했다"며 "간접증거와 정황, 범행 동기, 수법적 특성으로 볼 때 살인 유죄 심증의 보강증거 또한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지난 9월 2심은 1심과 다른 판단을 내렸다. 현장에서 발견된 피 묻은 족적과 피고인의 샌들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수사기관에서부터 항소심까지 이뤄진 다섯 차례의 족적 감정 가운데 '양 족적 사이에 동일성을 인정할 만한 개별적인 특징점이 없다'는 두 차례 감정 결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지문이나 다른 보강 자료 없이 오로지 족적 감정만 있는 상황에서 이 결과만으로는 피고인을 이 사건의 범인으로 보기에는 부족해 보인다"며 "감정 결과의 증명력을 제한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대법원도 2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피해자를 살해한 것으로 인정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증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단에,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하여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잘못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서현 기자 her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