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지미가 2010년 10월 부산 해운대 노보텔에서 열린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 배우 김지미 디렉터스 체어 증정식’에 참석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화려한 여자 스타로 군림했던 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별세했다. 85세.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10일 “김지미 배우가 7일 오전(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고인은 2000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직을 마친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해 왔다. 사인은 저혈압으로 인한 쇼크인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1950년대 중반 한국 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90년대 초까지 꾸준히 활약했다. 자신이 제작까지 겸한 ‘명자 아끼꼬 쏘냐’(1992·감독 이장호)까지 출연작은 700여 편에 달한다. 60~70년대에는 한 해에 30여 편의 영화를 찍느라 늘 겹치기 촬영을 했다. “충무로의 모든 시나리오는 김지미를 거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4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난 고인은 덕성여고 2학년 때 명동 다방에서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황혼열차’(1957)로 데뷔했다. ‘별아 내 가슴에’(1958·홍성기)의 흥행으로 스타가 된 고인은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1959·박종호), ‘장희빈’(1961·정창화) 등에 출연하며 6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김수용·임권택·김기영 등 거장 감독들과도 작업했다. ‘토지’(1974·김수용)에서 대지주 가문의 안주인 역을 맡아 파나마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길소뜸’(1985·임권택)에선 이산가족의 비극을 담아낸 절절한 연기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고인은 가련한 여자, 남자를 유혹하는 팜파탈, 강인한 여성 등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소화했다.
서구적인 얼굴과 세련된 이미지로 주목받았던 데뷔 초 모습. [중앙포토] |
그는 세련된 이미지와 서구적인 얼굴 덕분에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렸지만, “김지미는 김지미인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는 건 너무 저질스러운 얘기”라며 싫어했다.
그 별명은 잦은 결혼과 이혼 등 사생활과 연관된 것이기도 했다. 18세 때 열두 살 연상의 감독 홍성기와의 결혼과 이혼, 유부남 스타 배우 최무룡과의 열애로 간통죄 구속에 이은 결혼과 이혼, 일곱 살 연하의 톱가수 나훈아와의 동거와 결별, 심장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의 결혼과 이혼 등으로 늘 화제의 중심에 섰다. 최무룡과 이혼할 때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계의 여장부로 통했던 고인은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86년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한 뒤 ‘티켓’(1986·임권택),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장길수) 등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등 영화 행정가로도 일했다.
“나 이상의 배우는 없다는 자신감으로 연기했다”는 고인은 백상예술대상·청룡영화상·대종상 등을 수십 차례 받았다. 2010년 ‘화려한 여배우’라는 타이틀로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2016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12일 현지에서 장례가 마무리될 것을 고려해 영화인장은 치르지 않고, 추모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정현목 문화선임기자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