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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연극 거장, 첫 노래 콘서트 “마지막도 내가 연출할 것”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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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연극 거장, 첫 노래 콘서트 “마지막도 내가 연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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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 초대 연극원장 김우옥

연극계 인사들 100명 초청해 무대
1년 반 연습한 노래 10곡 선보여
“연극 하던 내가 노래를 한다니까, 많은 분이 ‘늦바람이 세게 났네’ 하시더라고요.”

무대 위 ‘어른’의 농담에 객석이 웃음바다가 됐다. 주말인 지난 6일 오후, 서울 한남동 더줌아트센터 무대에 선 이는 김우옥(91)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명예교수. 평생 서울예대와 한예종에서 가르치고 연극 연출만 해온 그는 연극판 동료·후배·제자 100여 명을 초청해 ‘김우옥쇼’를 열었다. 구순을 넘긴 나이에 1년 반쯤 노래 레슨을 받으며 준비하고 마련한 첫 ‘단독 콘서트’. 또 연출가답게 자신의 마지막까지 스스로 연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기도 했다. 관객들 웃음이 잦아들자 그가 덧붙였다. “음악 시간도 초·중학교 때뿐이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6·25가 났거든.” 노장의 늦바람을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 ‘역사 개그’에 또 웃었다.

김우옥은 1970년대 뉴욕대에서 연극학 박사 학위를 받고 뉴욕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실험극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연출가. 귀국 후 서울예대 교수와 동랑레퍼토리 극단 대표, 한예종 초대 연극원장,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아시테지) 한국본부 이사장 등을 지냈다. 우리 실험극과 청소년극의 ‘대부’이며, 지난해 동아연극상을 받을 만큼 여전히 왕성히 활동하는 ‘현역’이다.

한예종 초대 연극원장을 지낸 김우옥 연출가가 91세에 처음으로 연 노래 콘서트 '김우옥쇼'. /이태훈 기자

한예종 초대 연극원장을 지낸 김우옥 연출가가 91세에 처음으로 연 노래 콘서트 '김우옥쇼'. /이태훈 기자


그는 이날 우리 시에 멜로디를 붙인 노래와 이탈리아 가곡 등 총 10곡을 불렀다.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허림 시 윤학준 곡 ‘마중’), ‘조그만 산길에 흰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욱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김효근 시·곡 ‘눈’) 같은 노랫말이 마치 그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노장은 김소월 시 ‘산유화’를 부르며 산새처럼 어깨를 들썩였고, 맑고 시원한 산속 샘물을 마신 뒤 숨겨놓고 돌아선다는 내용의 김동환 시 ‘아무도 모르라고’를 부르며 소년처럼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막간 무대 배경에 영사한 ‘메이킹 필름’ 속 그는 “내가 노래를 잘할 거라고 생각하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다들 ‘얼마나 못 하나 보자’ 하겠지.” 관객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고, 다하고 있구나, 그것만은 보여주고 싶어.”

그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자세가 꼿꼿하고 걸음걸이도 건강했다. “건강 비결을 많이들 물으시는데. 속 시원하게 무료 공개하겠습니다.” 손님들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자고 일어나면 바로 바깥으로 나가 속보로 걸어요. ‘내 삶의 목표는 운동이다’ 생각합니다. 작년에 1㎞ 8분 14초 개인 최고 기록도 세웠습니다.” 그는 “빨리 걸으면 머리가 다시 작동한다. 그래서 자꾸 새 작품을 연출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김우옥(91) 연출가는 이날 '김우옥쇼' 마지막 노래 '마이 웨이'를 부를 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헌팅 캡과 머플러를 한 채 무대 뒤로 퇴장하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갑자기 관객을 향해 돌아서며 마지막 부분을 열창했다. 그가 91세에 처음으로 연 노래 콘서트 '김우옥쇼'. /이태훈 기자

김우옥(91) 연출가는 이날 '김우옥쇼' 마지막 노래 '마이 웨이'를 부를 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헌팅 캡과 머플러를 한 채 무대 뒤로 퇴장하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갑자기 관객을 향해 돌아서며 마지막 부분을 열창했다. 그가 91세에 처음으로 연 노래 콘서트 '김우옥쇼'. /이태훈 기자


‘김우옥쇼’ 막바지, 그는 “내 죽음도 내 스스로 연출하고 싶다. 여러분 모두가 증인”이라며 단단히 준비했던 말을 마침내 꺼냈다.

“평생 연극만 하고 사느라 가진 건 아파트 한 채뿐이에요. 정리해서 서울예대와 한예종에 기부하겠습니다. 아시테지에도 기부할 테니 젊은 창작자들을 해외에 내보내 좋은 작품 보고 공부해서 돌아와 우리 청소년극에 기여하게 해주세요.” 아들인 래퍼·방송인 김진표를 포함한 관객들이 그의 결단에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그가 부른 마지막 노래는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였다.

1시간 반여 노래와 이야기 콘서트를 마친 그가 무대 앞에서 손님 한 명 한 명을 손잡고 이야기 나누며 배웅했다. 이날 함께한 손님들에게 ‘김우옥쇼’는 그가 연출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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