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한 도시를 세계적 명소로 탈바꿈… 현대 건축의 선구자

프리츠커상 받은 프랭크 게리 별세
1997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등
건축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가

파격의 미학으로 전 세계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꿨던 현대 건축의 거장 프랭크 게리(Gehry·96)가 5일(현지 시각) 미국 LA 자택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별세했다고 게리의 건축 사무소 측이 밝혔다.

AP 연합뉴스

1929년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으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건강을 이유로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해 USC와 하버드대 디자인 대학원을 졸업했다. 고인은 초창기부터 르 코르뷔지에, 가우디 등이 보여준 유럽 건축의 창조적인 형태미와 견고함, 유동적인 포용성에 반해 건축의 정의를 다시 쓰기로 결심한다. 이때 프랭크 오언 골드버그라는 유대계 이름의 성(姓)을 스스로 ‘게리’로 바꿨다.

모더니즘의 엄격한 기능주의 등이 서구 건축계를 지배하고 있을 당시, 프랭크 게리는 뒤틀리고 휘어지는 곡선으로 건축을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또 합판, 판지, 체인 등 저렴한 재료들을 디자인 요소로 차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1997년 완공된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티타늄 패널로 뒤덮인 이 은빛 건축물 하나로 쇠락해 가던 인구 40만명의 스페인 공업 도시가 매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부활했다.

AFP 연합뉴스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일반적인 건축에 쓰이는 기둥과 지지대(보) 없이 유기적이고 자유로운 곡선형태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데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작품이 성취해야 할 수준과 제한된 예산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 건축가였다. 지난 2012년 본지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빌바오 미술관 예산은 평방미터(㎡)당 300달러(약 34만원)였다. 당시 그는 프랑스 항공우주 산업용으로 개발된 소프트웨어인 ‘카티아(CATIA)’ 프로그램을 건축에 과감히 도입했다. 컴퓨터를 건축에 도입한 선구자였던 셈. 3차원의 모형을 마치 종이 모델의 전개도를 만들듯이 2차원 평면조각으로 나누고, 비정형의 형태를 실제 구조물로 구현해냈다.

전 세계 도시들이 그를 앞다퉈 벤치마킹하며, 이른바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후 그의 이름은 ‘도시 재생’의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1989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을 당시, 심사위원단은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험가”라고 평했다.

주목을 받는 만큼 극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건축을 ‘장식품’이라 부르거나, 그에게 ‘과시욕’이 많다고 비판한 이들이 있었다. 고인은 이들의 비판을 일축했다. 그는 “(나는) 자아를 과시하기 위해 건축을 하는 게 아니다”라면서 “건축주와의 계획과 예산, 공정 스케줄을 맞추기 위한 수십 개의 모형, 기능성과 주변 환경 고려 등에 대한 미칠 듯한 고민과 노력에 대해선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어 댄다. 건축을 하는 건 (그곳에서) 살든, 일하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대표작으로는 돛단배 혹은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미국 LA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2003), 12개의 거대한 유리 돛이 겹겹이 쌓인 듯한 프랑스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2014), 수원 화성과 동래학춤의 우아한 너울에서 영감을 받은 ‘루이 비통 메종 서울’(2019) 등이 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일했다. 최근까지도 미 LA 콜번 음악학교에 1000석 규모 콘서트홀을 비롯해 2029년 완공을 목표로 미 베벌리힐스에 루이비통 플래그십 스토어 등을 짓고 있었다. 미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 건축 비평가인 폴 골드버거는 “가장 진보된 기술을 사용해 가장 모험적인 일을 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베르타와 두 아들이 있다.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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