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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원 육박 환율은 위기... 美 증시 버블 터지면 재앙”

조선일보 김홍수 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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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원 육박 환율은 위기... 美 증시 버블 터지면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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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말하는 고환율·저성장 해법
‘비상조치권’ 발동해서라도 ‘환율 악순환’ 고리 끊어야
자산 버블 낳은 ‘글로벌 유동성 대잔치’ 막바지
1200조원 규모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을
한국 경제 활로로 삼아야
원달러 환율이 1450원 선을 뚫고 올라간 뒤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국민연금 환헤지 규모 확대 등 온갖 대책을 내놓아도 요지부동이다. 이전에 원달러 환율이 1450원 선을 넘어선 것은 단 세 번뿐이었다. 1997년 외환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작년 12·3 계엄 사태. 환율 수준만 보면 한국 경제는 위기 상황이다. 그런데도 증시는 4000선을 오르내리는 불장이다. 반도체 초호황 덕에 수출도 잘된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은 1%대에 머물고 있고, 체감 경기는 최악이다. 30년 이상 금융·외환·거시경제 정책을 다뤄온 원로 경제 관료는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을 만나 고환율·저성장 해법을 물었다.

◇고환율, 감내할 수준 넘어섰다

-고환율이 장기화되고 있다. 원인을 뭐라고 보나?

“경제의 기초 체력이 강하고 성장 가능성이 커야 원화가치가 오를 텐데, 그렇지 못한 게 근본 원인이다.”

-정부는 서학 개미,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에 원인이 있다는데.

“한국과 미국 간 금리 역전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대내외 금리 차가 고환율을 낳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의 미국 경제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달러의 신뢰도는 원화와 비교할 수도 없는데 한국의 금리가 미국 금리보다 더 낮다. 이런 상황이 수년간 계속되면서 환율을 1100원대에서 1400원대 후반까지 끌어올렸다.”


-정부가 여러 대책을 내놔도 효과가 없다.

“한미 간 금리 역전과 미국 증시 붐에 투자자들이 몰려가고 그로 인해 환율이 오르니까 불안해진 해외 투자자들은 투자금을 빼가고 있다. 기대 심리로 기업 자금도 해외에 머물고 있다. 악순환 고리에 빠졌다. 대책을 내놔도 안 통하는 건 시장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해법이 있나?


“고환율을 잡는 정공법은 근본적인 경제 체질 강화와 대내외 금리 격차를 줄이는 거다. 우리나라의 대외순자산이 1조달러가 넘고, 외환보유액도 4000억달러가 넘는다. 연간 경상수지 흑자액이 1000억달러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환율이 고공 행진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IMF 외환 위기 때의 경상수지 적자, 대외순채무, 외환보유액과는 비교조차 안 된다. 외환 위기를 걱정할 상황은 아니다. 외환관리법을 보면 환율 안정을 위해선 정부가 비상조치권(safeguard)을 행사할 수 있게 돼 있다. 정부가 약해 보이면 안 된다. 시장 개입 의지 등 시장에 강력한 시그널을 줘야 한다.”

※외환거래법 6조는 국가 비상 상황 시 정부가 자본 거래 정지, 지급 및 수령 제한, 대외 채권 회수 의무 등 외환 거래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

-지금 금리를 올리면 가계 부채 문제가 터질 수 있다.


지난 2일 오전 서울 중구 그랜드센트럴에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본지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장련성 기자

지난 2일 오전 서울 중구 그랜드센트럴에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본지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장련성 기자


“가계 부채는 언젠가 칼을 대 수술해야 할 문제다. 아무 비용을 치르지 않고 환율을 안정시킬 수 있는 마법은 없다.”

-지금처럼 고환율이 지속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

“고환율은 에너지와 원자재값을 끌어올려 기업을 곤경에 빠트린다. 달러 빚이 있는 기업엔 치명적이다. 고환율은 물가를 끌어올려 가계에도 큰 고통을 안긴다. 결과적으로 기업과 가계의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 성장률이 낮아지고 국가 신인도에도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지금의 고환율은 우리 경제가 쉽게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글로벌 과잉 유동성이 자산 버블 키워

-실물 경제는 안 좋은데 증시는 불장이다. 어떻게 봐야 하나?

“저평가됐던 한국 증시가 제값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증시 불장의 동력은 과잉 유동성이다. 끝없이 오르는 서울 집값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역대급 불장인 미국 증시 역시 유동성 장세로 보나?

“그렇다. 주식·부동산·금·비트코인 등 작금의 에브리싱 랠리의 원동력은 과잉 유동성이다. 이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1980년대 이후 세계 경제사를 봐야 한다. 1980년대 이후 세계 경제는 저물가·저금리·고성장을 구가해 왔다. 이 40년 동안 미국의 기준 금리는 20%에서 0%까지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유동성이 풀렸는데, 물가는 오르지 않았다. 세계 시장에 등장한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한 덕분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도 여기에 기여했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은 인플레이션 걱정 없이 유동성을 풀 수 있었다.”

-이제 호시절은 끝났나?

“중앙은행에서 유동성을 늘린다는 건 기업과 가계에 빚을 안기는 거다. 세계 경제가 고성장을 만끽하는 동안 빚이 엄청 쌓였다. 1995년 208%였던 선진국의 부채 비율이 2021년엔 290%가 됐다. 중국은 96%에서 286%로 급증했다. 미국은 253%, 일본은 400%에 달한다. 한국도 가계·기업 부채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정부 부채는 아직 낮은 편이지만 증가 속도가 너무 빠르다. 부채는 갚기 전에는 안 없어진다. 세계가 거대한 부채 폭탄을 쌓아놨다. 이 부채 폭탄 때문에 금리·외환·재정 정책 등 매크로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주식 투자자들은 버블이 터지기 전에 빠져나오면 된다고 여긴다.

“2000년 IT(정보통신) 버블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가 낭패를 본 투자자가 많았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나스닥이 400% 올랐다. 그러다 버블이 터졌다. 글로벌 증시 시가총액이 5조달러나 증발하고. 미국 나스닥은 5분의 1 토막이 났다. 아마존 주가도 2년간 95% 폭락했다. 미 증시 붕괴 위험을 간과해선 안 된다. 2000년 IT 버블 붕괴 때, 우리나라에서도 코스피는 반 토막 났고, 코스닥 지수는 80% 폭락했었다. 미 증시가 무너지면 한국 증시도 예외가 되기 어렵다.”

◇“캄캄한 터널 통과 중, 끝은 낭떠러지”

-현재 한국 경제 상황은 어떻게 보나?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은 3.2%(OECD 전망치)인데 한국의 성장률은 1.0% 수준이다. 옛날 같으면 정부, 언론, 학계 등에서 난리를 쳤을 텐데, 별 위기의식이 없다. 성장 의지 자체가 사라진 것 같다. 1997년 외환 위기 땐 세계 경제 여건이 좋아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땐 외환 위기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경제 체질을 튼튼히 해 놓은 덕분에 수월하게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이후 산업 구조조정이나 사회 구조 개혁은 미루고, 돈을 풀어 연명해 온 탓에 경제 체력이 바닥에 떨어졌다. 여기에 탈세계화, 보호무역으로 세계 경제는 장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국 경제는 그동안의 고속 성장으로 체력을 소진해 이제는 숨 고르기를 해야 하는데, 캄캄한 터널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중국의 굴기에 주력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 10대 산업과 중국이 ‘제조 2025’에서 핵심 육성 산업으로 꼽았던 산업이 거의 겹친다. 석유화학, 철강,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우리 주요 산업이 하나둘 잡아먹혀 이제 반도체와 자동차 정도만 남았다. 20년 동안 산업 구조 조정을 미루고 유동성에 의존해 연명해 온 결과다. 정부가 각 분야 최고 전문 인재를 모아 산업 미래를 설계할 태스크포스를 꾸리고 대응책을 찾아야 할 때다. 한국경제는 이제 진짜 막바지 단계에 와 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일본도 위협 요소가 되나?

“1970년대 세계 조선소 1등부터 9등까지 일본 조선소였고, 현대조선이 10등이었다. 1980년대 세계 10대 반도체 중 6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미국의 압력 탓에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모두 문을 닫았지만,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살아남았다. 지금 미국 IBM, 대만 TSMC가 일본의 반도체 부활을 돕고 있다. 한국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일본 조선 산업도 마찬가지다.”

-고환율이 제2의 외환 위기를 예고하는 전조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1997년 외환 위기는 경상수지 적자가 수년째 이어지는 상황에서 달러 부채를 조달한 은행들의 부도를 막느라 외환 보유액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외환 위기 가능성은 없지만, 경제가 저성장 늪에 오랫동안 빠져버릴 수 있다. 한국 경제 세계 순위가 2020년에 10위에서 14~15위로 떨어졌다. 지금 이대로면 추락이 계속될 것이다.”

-미·중 패권 전쟁 탓에 한국이 피해를 입고 있다. 동맹국을 삥 뜯는 트럼프 정책을 어떻게 봐야 하나?

“흔들리는 달러 기축통화를 지키겠다는 몸부림으로 보면 된다. 지난해 미국의 재정 적자가 1조8000억달러에 달했다. 무역 적자도 9000억달러에 이른다. 경제학자들이 입을 모아 ‘지속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트럼프 2기의 경제 정책은 재정·무역 적자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귀결되고 있다. 국제 정치적으로는 신고립주의 외교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해외 개입은 축소하고 안보·경제 요충지만 집중 관리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 이런 흐름을 정확히 읽고 기회를 엿봐야 한다.”

◇우크라이나 재건, 한국의 활로

-어떤 기회가 보이나?

“미국의 종용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곧 끝난다.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이 1200조원 규모다. 2차 대전 후 유럽 재건 프로그램이었던 마셜 플랜의 절반 규모에 이른다. 러시아 편에 섰던 중국은 이 시장에 못 들어간다. 한국은 러시아 제재에 동참해 현대차가 쫓겨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발언권이 있다. 나토와 협조해서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국토와 기업이 국가 소유인 우크라이나는 대규모 재건 사업 재원 조달이 가능하다. 탈냉전 후 동유럽 국가 재건을 도왔던 EBRD(유럽부흥개발은행) 등 국제기구도 역할을 할 수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산업화를 이룬 한국의 경험이 우크라이나 재건의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다”면서 “단순 재건이 아니라 한국처럼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나. 우크라이나는 대한민국의 활로가 될 수 있다. 정부와 산업계가 태스크포스 팀을 꾸려서 치밀한 계획을 짜야 한다.”

-미래 국가 전략 차원의 활로는?

“무엇보다 성장 의지를 회복하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감안해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살리는 국가 전략이 필요하다. 한반도는 중국·러시아라는 대륙 세력이 해양으로 나가기 위한 길목이고, 미국·일본이라는 해양 세력이 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한 바로 징검다리 위치다. 대륙·해양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닿는 지점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철도의 기점이자 앞으로 열릴 북극 항로의 기점이 될 수 있기에 세계 물류의 핵심 축으로 부상할 수 있다.”

-걸림돌은?

“지금처럼 정치·사회의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돼 있어서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진영 논리는 단기적으론 특정 세력의 이익이 될지는 몰라도 결국은 국가의 미래를 좀먹는다. 무엇보다 선결 과제는 국민 대타협이다.”

-정부가 우선 할 일은?

“국력이 떨어져 1910년 경술국치 같은 치욕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이번 경제 전쟁에서도 이겨야 한다. 경제 전쟁에서 나서는 병사는 기업이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병사들을 잘 먹이고 좋은 무기 줘서 전장에 내보내지 않나. 우리 기업이 경제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모든 규제를 혁파하고 국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해야 한다.”

김 전 위원장은 공직 퇴임 후 고대사 연구가로 변신, 한민족의 뿌리를 연구해 왔다. 인터뷰에 앞서 1시간여 동안 유라시아 대초원의 기마 유목 민족에서 기원하는 ‘한민족의 강인한 DNA’를 역설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20세기 들어 60년간 나라를 빼앗기고 분단과 전란이라는 처참한 역사를 보냈지만 이후 60년간 세계 10대 국가로 성장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한민족 DNA가 그 원동력이었다”면서 “다시 어려운 시기가 오더라도 강인한 DNA로 극복할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김홍수 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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