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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서 튼 19금 애니에 관객들 충격… 연상호 이름 알린 첫 작품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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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서 튼 19금 애니에 관객들 충격… 연상호 이름 알린 첫 작품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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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지옥'은 연상호 감독의 첫 2D 애니메이션으로 연상호라는 이름을 독립영화계에 알렸다. 스튜디오다다쇼 제공

단편 '지옥'은 연상호 감독의 첫 2D 애니메이션으로 연상호라는 이름을 독립영화계에 알렸다. 스튜디오다다쇼 제공


당신이 잘 몰랐던 연상호 감독<2>


2003년 8월 중순 저녁이었다. 한여름 더위를 식히는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강원 강릉시 강동면 정동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한 곳을 응시했다. 스크린이었다. 제5회 정동진독립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단편 애니메이션 ‘지옥’(2002)이 상영됐다. 적막한 운동장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한 중년여성은 함께 온 아이와 함께 서둘러 상영장을 떠났다. 여름밤 바닷가 인근 야외 영화 상영이라는 낭만을 기대하고 왔던 이로서는 당혹스러워 할만 했다.

상영시간 11분짜리 ‘지옥’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국내 관객의 통념을 깨부수는 내용과 영상을 담고 있다. 무료하게 살아가던 20대 남자 앞에 천사가 나타나 죽음을 예고한다. 2시간 뒤 사자들이 남자를 지옥으로 끌고 가리라는 거다. 남자는 순순히 따라 갈지, 도망쳐 불안 속에서 평생을 살지 고민하다 용단을 내린다. 기이한 이야기가 잔혹하고도 파격적으로 묘사된다. 사자들에게 사람 몸이 찢기고 얼굴이 뜯어진다. 성기 노출장면까지 나온다. ‘19금’ 애니메이션이었으니 아이엄마가 애와 함께 정동초등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야외 상영장을 황급히 벗어날 수 밖에. 연 감독은 상영이 끝난 후 관객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분위기는 썰렁했다. 예상치 못한 애니메이션에 관객들은 충격이 큰 듯했다.

‘지옥’은 연상호라는 이름을 독립영화계와 애니메이션계에 알린 영화다. 2002년 제16회 십만원비디오영화제에서 첫 상영된 후 화제를 모았고, 2003년 인디포럼와 정동진독립영화제를 거쳐 서울독립영화제에 선보이기도 했다. 웬만한 국내 독립영화 축제들로부터 초청장을 다 받은 셈이다. ‘지옥’은 제작 방식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지옥’은 연상호 감독이 가내수공업식으로 만든 영화다. 연출과 제작, 촬영, 각본, 편집, 조명, 음악, 미술을 홀로 다 해냈다. 녹음을 제외한 애니메이션 작업 대부분을 혼자 감당했다.

‘지옥’은 연상호 월드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파격적인 이야기 뿐 아니라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고민, 신과 인간 관계에 대한 사유가 담겨있다. ‘지옥’이 없었다면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 ‘서울역’, ‘부산행’(2016) 등 연 감독의 영화 이력이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 감독은 ‘지옥’을 발판 삼아 유명 영화인으로 발돋움했으나 ‘지옥’으로 지옥 같은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20대 청년 연상호는 ‘지옥’을 어떻게 만들었고, 이 영화는 연 감독 영화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미술학도,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하다



연상호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애니메이션 감독의 꿈을 키웠다. 스튜디오 지브리 제공

연상호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애니메이션 감독의 꿈을 키웠다. 스튜디오 지브리 제공


연 감독은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일본 TV애니메이션을 즐겼다. 국내 지상파TV에서 방송된 애니메이션 시리즈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와 ‘미래소년 코난’(1978) 등이 소년 연상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감독이라는 역할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중학교 때는 일본 만화책을 보느라 학업은 뒷전이었다. 비슷한 시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의 라퓨타’(1986)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등이 어둠의 경로를 통해 한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연 감독은 ‘미래소년 코난’(미야자키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과 비슷한 화풍을 보며 감독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아갔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겠다” 생각하며 감독의 꿈을 막연하게 키워나갔다. 미술로 대학입시를 준비한 것도 애니메이션 감독에 대한 동경이 작용했다.


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 촬영장에서 배우 김신록에게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 촬영장에서 배우 김신록에게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연 감독은 1996년 상명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애니메이션학과는 막 생길 무렵이라 지원 엄두를 내지 못 했다. 1지망으로 지원했던 학교에 재도전하기 위해 재수를 할 무렵 그는 학원 강사와 대화를 나누다 존재론적 고민과 맞닥뜨렸다. “무슨 일을 하고 싶어서 재수를 하는 거지?”

영화감독의 길을 바로 걷기로 결심했다. 재수를 그만 두고 부모님께 사정을 해 고가의 6㎜ 일제 비디오카메라를 마련했다. 홍익대 근처를 오가며 알게 된 친구들과 단편영화를 촬영했다. 제목은 ‘너와 나’. 연 감독이 단편영화라 칭하기 부끄러워할 정도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습작이었다. 비싼 비디오카메라는 샀고, 뭔가는 해야했다. 비디오카메라의 특수기능을 활용해 스톱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D의 과대망상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막 치료를 끝낸 환자가 보는 창밖풍경’(1997)이었다. 첫 애니메이션이었으나 영상이 이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연 감독의 애착은 강하진 않았다.

시행착오 끝 만든 단편… 눈길 끌긴 했으나



단편 애니메이션 '지옥'은 천사가 사람들에게 나타나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통보한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스튜디오 다다쇼 제공

단편 애니메이션 '지옥'은 천사가 사람들에게 나타나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통보한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스튜디오 다다쇼 제공


연 감독은 2000년 군대를 제대했다. 세상은 크게 바뀌어있었다. 디지털과 인터넷 세상이었다. 컴퓨터 사양이 압도적으로 향상됐다. 동영상 프로그램은 비약적으로 진화했다. PC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었다. 연 감독은 비용과 에너지에 비해 결과물은 보잘것 없는 스톱애니메이션 대신 2D애니메이션으로의 전향을 모색한다.


연 감독은 복학을 미루고 ‘지옥’ 제작에 돌입했다. 그가 택한 방식은 ‘로토스코핑(Rotoscoping)’이다. 어떤 동작을 카메라로 찍은 후 각 프레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 이들을 이어붙이는 애니메이션 제작 기법이다. 동작이 실사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그림을 그리기 수월해 돈을 적게 들이며 효율성을 추구해야만 했던 연 감독에게 제격이었다.

단편 애니메이션 '지옥'에는 지옥의 사자가 등장한다. 사자의 몸동작 등을 연상호 감독이 연기했다. 스튜디오 다다쇼 제공

단편 애니메이션 '지옥'에는 지옥의 사자가 등장한다. 사자의 몸동작 등을 연상호 감독이 연기했다. 스튜디오 다다쇼 제공


연 감독은 ‘지옥’ 속 인물들의 동작을 본인이 연기해 카메라에 담았다. 컴퓨터에 영상을 불러내 프레임마다 인쇄한 후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들을 스캔해 컴퓨터로 옮겨 이들을 연결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뒤섞인, 고독한 나홀로 작업이었다.

연 감독은 꼬박 1년이 걸려 ‘지옥’을 완성했다. 다음은 이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냐가 문제였다. 연 감독은 수소문 끝에 배급사를 통해야 영화제에 갈 수 있고, 관객과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독립영화를 주로 배급하는 곳에 연락해 영화를 보냈다. 아무런 소식이 없어 답답한 마음에 전화해 문의를 하니 돌아온 답은 매정했다. “저희는 그런 영화 배급 안해요.” 연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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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