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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 된 공포”…‘연기천재’로 불렸던 여배우, 일본으로 떠난 사연 [인터뷰]

매일경제 한현정 스타투데이 기자(kiki2022@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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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 된 공포”…‘연기천재’로 불렸던 여배우, 일본으로 떠난 사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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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상 사이서 슬럼프…‘수상한 그녀’ 이후 방황, 포기할 생각도”


사진 I 엣나인필름

사진 I 엣나인필름


“한 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11살 때 처음 연기를 시작해 마냥 즐겁게 거침없이 연기했죠. ‘연기천재’라는 칭찬도 받고 ‘신인상’ ‘여우주연상’ 등 큰 상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죠. 그 후로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며 무너졌거든요.”

신작 ‘여행과 나날’(감독 미야케 쇼작)로 해외 씨네필들의 마음을 홀린 배우 심은경이 이번엔 국내 팬들과 만난다. 부담 반 설렘 반, 가슴 벅찬 감동을 품은 채로.

‘여행과 나날’은 어쩌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각본가 ‘이’(심은경)가 설국의 여관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을 보내며 다시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고요하고 잔잔하면서도 섬세하고 깊다. 마치 그녀를 닮았다.

5일 서울 동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묘하게 편안해지고, 살짝 웃음도 나오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나의 이야기도, 모두의 이야기도 되는 작품”이라고 차분하게 소개했다.

“평소 감독님의 찐 팬이었어요. 언젠가 함께 하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죠. (웃음) 부산(‘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함께 GV를 진행하며 짧지만 의미 깊은 첫 인연을 맺었고, 몇 년 뒤 그 꿈을 이뤘어요. 처음 출연 제안을 받고는 정말 뛸 듯이 기뻤어요. 무조건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절차상 대본은 봐야해서 받자마자 읽었는데…보고 나니 더 행복해졌죠. 영광 그 자체에요.”

요즘 말로 ‘성덕’이 된 셈. 실제 미야케 쇼작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을까.

심은경은 “(젊은 거장으로 불리시는 만큼)되게 무서우실 줄 알았는데 프로이면서도 아이 같은 순수함이 강하게 느껴졌다”며 “왜 그의 영화가 이렇게 아름답고, 강렬한 지 알겠더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고 깊은 애정과 신뢰를 보였다.


‘여행과 나날’ 심은경 스틸.

‘여행과 나날’ 심은경 스틸.


영화에선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우연히 한 시골에서 만난다. 여자는 동네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접근이 금지된 듯한 오솔길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남자를 만난다. “다시 살아난 느낌”이라는 이들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 다시 만난다. 이후 카메라를 들고 나선 여자는 눈이 휘몰아치는 한 산속에서 오래된 여관을 찾아 주인 벤조(츠츠미 신이치)를 만나게 된다.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이’가 만든 영화를 보여주고, ‘이’가 직접 여행을 떠나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내는 구조다.

그녀가 연기한 ‘이’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슬럼프에 빠지지만, 이를 용기 있게 마주한다. 심은경은 “극 중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대사가 있다. 그 대사 한 줄에 너무 몰입이 됐고, 빠져들었다”며 “내가 배우 생활을 하며 항상 느끼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캐릭터는 그걸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마주하고 헤쳐자간다. 굉장히 용기 있게 느껴졌다. 닮아있고, 공감가는 동시에 나보다 한 단계 나아가 있는 캐릭터였다. 매료될 수밖에 없더라”라고 했다.

깊이 이해한 만큼 그의 연기는 더욱 더 깊었다. 캐릭터와의 어울림이 단연 넘사벽. 그것을 알아보는 건 너무나 쉽고도 당연한 일이다. 결국 심은경은 이 작품으로 일본·싱가포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후보 올랐다.


사진 I 엣나인필름

사진 I 엣나인필름


“노미네이트 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는 그는 “모든 게 실감이 안 난다. 무엇보다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을 봐주신 게 뜻깊게 다가온다.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이번 작품 뿐만 아니라 지난 2020년 일본 영화 ‘신문기자’를 통해서도 한국 배우 최초로 일본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다카사키 영화제,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등에서 잇따라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MBC 글로벌 대작 ‘대장금’ 아역으로 데뷔해 ‘천재 아역’으로 불리며 수없이 많은 ‘상’을 휩쓸어왔던 그녀에게, ‘슬럼프’라니, ‘한계’라니. 그녀가 ‘아’ 캐릭터에서 공감했단 말이 와닿지 않았다.


그녀의 필모 가운데 굳이 흠집을 꼽자면, 2014년 방영된 KBS2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 정도다. 일본 원작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으로 방영 당시 시청률 고전과 함께 여주인공 심은경의 ‘연기력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일본판의 경우 드라마 전체 톤에 판타지가 있고,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여주 노다메(우에노 주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지만, 한국판에서는 바뀐 설정 아래 여주 캐릭터가 다소 튄다는 지적이 있었다.

심은경은 “11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고, 그땐 마냥 즐거웠다. 신나고 에너지가 넘쳤다. ‘아역 천재’ 수식어도 좋고,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단 욕심도 있었다”고 운을 뗐다.

“‘황진이’라는 드라마를 찍을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두려움이 생기더군요. 돌이켜보면 잘 하고 싶단 욕심에서 시작 된 것 같아요. 꿈꾸는 이상과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시기가 찾아왔달까요? 명확한 슬럼프의 시작은 ‘수상한 그녀’ 이후 백상에서 큰 상을 받았을 때에요. 준비되지 않은 제겐 너무 큰 상이었고, 그 이후로 큰 작품, 큰 역할을 맡을 때마다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어요. 방황이 시작된거죠.”

그러면서 “분명히 내 연기가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는데 어떻게 고쳐야할지, 바꿔야 할지, 대응해야할지 알수가 없었다. 확 다운이 되면서 의심이 깊어졌다. 천재가 아닌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너무 두려웠다. 그런 극단의 감정으로 한동안 힘들었고, 연기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놓았다.

‘여행과 나날’ 심은경 스틸.

‘여행과 나날’ 심은경 스틸.


그 방황은 수년간 지속됐고, 연기로 인한 슬럼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분명하게 방황은 멈췄다. 건강한 고뇌 정도로 해석될 정도다.

심은경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그저 좋아했던, 연기를 향한 그 순수한 감정을. 그 때의 마음을 기억하려고 애썼고, 떠올리다 보니, ‘천재가 아니고 설사 재능이 없다고 하더라도, 좋아하는 건 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거짓말처럼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그는 “그때를 기점으로 영화 ‘걷기왕’이란 작품을 찍었고, 이런 저런 시도를 통해 부딪히고 깨지기 시작했다. 일본 활동도 한 번 도전해 볼까 싶은 마음에 시작했던 것“이라고 했다.

“연기를 향한 두려움, 내 연기에 대한 고뇌와 의심은 계속되고 있지만, 어떤 욕망과 불편한 부담감에선 벗어나게 된 것 같아요. ‘상’ 같은 경우도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긴 하지만, 당시 제가 그 큰 상을 받은 이후 어떻게 됐는지를 스스로 알기 때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애써요. 어떤 결과, 상, 수치 등에 갇히지 않고 좋은 작품을 향해 순수하게 달려가자라는 마음으로 컨트롤하고 있죠. 그러다보니 초연해지고, 관객과의 만남은 더 설레고, 도전 의식은 더 강해진 것 같아요.”

끝으로 그는 “나에게 연기는 ‘끊임 없이 옥죄고 벽 같은 것’이자 ‘영원히 놓고 싶지 않은, 가장 잘 하고 싶은 것, 늘 궁금한 것’이다. 최고가 되고 싶단 생각은 이젠 없다. 그게 연기 인생이 전부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라고 미소 지었다.

심은경 주연의 ‘여행의 나날’은 오는 12월 10일 국내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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