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장’ 대세 행보 대신 섬 다큐 선택…‘노개런티’ 류승룡의 품격
정여율 대표가 통영에서 어렵게 찾아내 마련한 축하케이크. 사진|강제윤SNS |
[스포츠서울 | 배우근 기자]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로 화제의 중심에 선 배우 류승룡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선택으로 눈길을 끈다.
수억원의 개런티를 받는 ‘대세’ 배우가 작은 독립 다큐멘터리에 사실상 노개런티로 출연을 결정했다. 이유는 단 하나, 섬과 바다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어서다.
류승룡은 최근 통영에서 사단법인 섬연구소가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파시’(감독 강제윤·최현정)에 모데레이터로 출연하기로 약속했다. 강제윤 감독(섬연구소장)의 SNS에 따르면, 이 결정은 제작진의 요청이 아니라 류승룡의 먼저 제안에서 시작됐다.
강 감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통영 체류 4일째인 어제 아침 나그네(강제윤)의 집에서 차를 함께 마시던 중 갑자기 류배우가 “ 형님, 파시 영화 나레이터로 왜 안불러 주셨어요?” 하며 섭섭해 했다. 촬영으로 바쁜 사람을 부르기 미안했다. 그리고 파시는 나레이션을 쓰지 않는다 했더니 대뜸 “그럼 모데레이터로 출연하게 해주세요.” 했다. 그렇게 류승룡의 다큐 영화 <파시> 출연이 확정됐다.
수억원의 출연료를 받는 정상급 배우가 상업성 1도 없는 독립 다큐멘터리에, 잠깐의 특별 출연이 아니라 작품을 이끌어가는 안내자 역할로 참여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동안 감독이 직접 맡아오던 모데레이터 역할의 절반을 떠맡으며, 류승룡은 자신의 이름값보다 영화가 담고자 하는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겠다는 선택을 했다.
류승룡이 섬바다음식학교 팀원과 통영 전통요리 ‘개조개 유곽’을 만들고 있다. 사진|강제윤SNS |
섬연구소는 올해 초부터 섬과 바다의 역사와 가치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파시’를 제작 중이다.
‘파시’는 파도 위에 열린 해상 시장을 뜻한다. 흑산도·위도·연평도의 조기 파시, 임자도 타리와 굴업도·덕적도의 민어 파시, 청산도·욕지도 고등어 파시, 조도 섬등포와 하의도 봉도의 꽃게 파시, 영덕 축산항 오징어 파시 등 전국 수십 개 섬에서 열렸던 거대한 바다 장터였다.
물고기 떼가 몰려오는 철마다 한산하던 섬과 포구에 수천 척의 어선과 수만 명의 어부·상인이 모여들어 거대한 임시 해상 시장을 이루던 시절, 파시는 공업화 이전 우리나라 최대 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철강·반도체 산업에 비견될 만큼 국가 경제의 핵심 축이었지만, 섬과 해상 문화에 대한 무관심 속에 그 역사는 잊혀졌다. 정부가 나서도 모자랄 작업을 민간 연구소가 떠안고 있는 이유다.
류승룡, 대추나무 이창선 대표와. 사진|강제윤SNS |
섬연구소는 올해 완성한 ‘흑산도 파시’를 제1회 흑산 섬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한 데 이어, 연평도·위도의 조기 파시, 임자도 타리 민어 파시, 청산도·욕지도 고등어 파시, 조도 꽃게 파시, 영덕 축산 파시 등으로 확장판을 준비 중이다. 여기에 국민 배우 류승룡이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류승룡의 선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강 감독의 다른 글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JTBC 드라마 종영 직후, 통영의 겨울 맛을 잊지 못해, 그리고 섬이 그리워 통영 청년마을 섬바다음식학교를 다시 찾은 일. 지인을 연결해 주면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 사이에 인연을 만들어 준 일. 계절이 지나도 좋아하는 청각 냉국을 기억하고 챙겨준 식당과, 그 정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까지,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그를 “섬을 가장 사랑하는 배우”라고 부른다.
수항도에서 구출한 댕댕이들과 함께한 류승룡. 사진|강제윤SNS |
실제 활동도 그렇다.
류승룡은 섬연구소 회원으로 여러 섬을 함께 답사해 왔고, 천연기념물 백령도 사곶해변 살리기 프로젝트에서는 운전기사이자 사진사로 자원활동을 했다.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자문위원, 국가기념일인 섬의 날 홍보대사도 무보수로 맡았다.
섬의 날 ‘백섬백길’ 걷기 대회에서는 효자도와 삽시도를 직접 걸으며 참가자들을 이끌었고, 국립 한국섬진흥원 설립을 위한 국회 포럼에서는 기록 사진을 남기는 자원활동에 나섰다.
여수 무인도 수항도에 고립된 강아지를 함께 구조한 일, 보성 장도 부수마을 예술섬 만들기 자원활동, 통영 이중섭 거주지였던 나전칠기 기술원 건물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까지, 섬과 바다를 위한 활동 곳곳에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사진|강제윤SNS |
대중이 보는 류승룡은 흥행 배우, 대세 드라마의 주연, 탁월한 연기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통영과 섬에서 함께한 이들이 기억하는 류승룡은 조금 다르다. 좋은 숙소보다 친구의 집을 택하고, 돈이 되는 상업 영화보다 기록 영화에 먼저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 스스로를 내세우기보다, 섬과 사람들을 앞에 세우는 사람이다.
‘김부장 이야기’의 성공 이후 가장 바쁜 시기에도 그는 다시 섬을 찾았고, 이번에는 잊힌 바다 산업의 역사를 복원하는 다큐멘터리에 자신의 이름을 보탰다. 이익보다 의미를, 효율보다 가치를 우선했다.
스크린 밖에서 드러난 그의 품이, 작품만큼이나 반짝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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