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낙엽’ 원화값 급락에도
국가부도위험은 여전히 낮아
‘고환율 = 위기’ 공식 무너져
환율 움직임, 영원하지 않아
헤지없는 달러투자 경계할 때
국가부도위험은 여전히 낮아
‘고환율 = 위기’ 공식 무너져
환율 움직임, 영원하지 않아
헤지없는 달러투자 경계할 때
글로벌 금융위기가 잠잠해지고, 뒤이어 찾아온 유럽재정위기도 비교적 순탄하게 지나가던 2012년 어느날, 한국은행 고위관계자와 길을 걷다 ‘옛날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금융위기로 원화값이 장중 한때 달러당 1597원까지 폭락했던 2008년 말~2009년 초 위기상황 때 이야기였다. 당시 외환당국은 국내 주요 수출기업과 간담회를 열고 환율 안정에 힘을 보태달라고 당부했다. 수출기업들이 나서 보유 달러를 풀면 ‘묻지마 달러 매수’가 극심하던 당시 시장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러 매물이 좀 나오긴 했었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아니오”라며 몹시 실망스러웠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달러 대비 휴지조각된 원화가치.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
결과부터 먼저 보자면, 2009년 연평균 원화값은 달러당 1495원이었다. 그리고 2010년 달러당 원화값은 연평균 1150원을 기록했다. 외환당국의 협조요청에도 굴하지 않던 기업들이 얼마쯤에 달러를 내다 팔았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물론 기업들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으며 생긴 달러 유동성 부족 트라우마는 쉽사리 극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환율 움직임에 ‘쏠림’은 있을지언정, 일방적인 ‘방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기업이익이 늘어나면 끝없이 상승세를 나타낼 수 있는 주가와 달리, 환율은 어디까지나 국가 간 통화 교환비율일 뿐이다. 경제 펀더멘털을 과도하게 이탈한 환율 움직임은 늘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IMF가 세계적인 불황과 금융시장 혼란을 경고한 가운데 지난 2001년 9월 각국 증시가 동반 폭락세를 보였다. [매경DB] |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신용위험 수준을 나타내는 5년물 CDS 프리미엄은 지난 3일 22.25bp(1bp=0.01%)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비상계엄 직후인 12월 9일 36.75bp 대비 40% 가까이 내려간 숫자다. 과거 원화약세가 국가신용도에 ‘빨간불’로 인식돼던 때에는 CDS 프리미엄이 내려갈 경우 이를 호재로 받아들여 원화가 강세를 나타냈었다. 하지만 원화값은 지난해 12월 9일 달러당 1437.0원에서 지난 3일 1468.0원으로 2% 가량 약세를 나타냈다. 시장에서 평가하는 국가신용도가 좋아졌음에도 원화가 이례적 약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원화 약세에도 안정적인 흐름 나타내는 한국 CDS 프리미엄. [국제금융센터] |
한국이 불안해서 원화가 ‘휴지’처럼 변한 것이 아니다. 현재 외환시장은 펀더멘털이 아닌 수급이 지배하고 있다. 연기금과 개인이 해외주식·채권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는데다, 미국의 대외 무역정책 강경기조 장기화를 감지한 우리 기업들은 해외 현지 공장 투자에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여기에 대미투자펀드 조성 이슈까지 겹치면서 우리나라의 달러 수요는 역대급 규모를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달러 수요가 단기간에 멎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한국이 지닌 수출경쟁력을 감안할 때, 달러 수요 우위가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라는 점이다.
지난달 말 금융통화위원회 당시 이창용 한은 총재는 “(국민연금 환헤지는)오히려 국민 노후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국민연금의 달러 매도를 통한 전략적 환헤지가 조만간 시행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행간에서 읽힌다.
내년 4월부터 한국 국채가 세계 주요 채권지수 중 하나인 세계국채지수(WGBI)에 편입된다는 소식도 참고해 볼 만하다. 편입 뒤 유입될 외화규모는 560억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 원화 약세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서학개미의 미국주식 순매수액은 올들어 11월까지 305억달러 규모다.
환헤지형 상장지수펀드(ETF)라는 대안을 외면하고 있는 서학개미나 투기적 수요가 은연중에 녹아있는 달러예금 보유자들에게 주어진 ‘황금시간대’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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