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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연금술 1500년, 인류 지성사로 복원하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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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 연금술 1500년, 인류 지성사로 복원하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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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벨기에의 바로크 화가 다비트 테니르스의 그림 ‘연금술사’. 독일 바에에른 주립 회화수집관 소장. 나남 제공

17세기 벨기에의 바로크 화가 다비트 테니르스의 그림 ‘연금술사’. 독일 바에에른 주립 회화수집관 소장. 나남 제공


16세기 잉카 제국을 침탈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황금이 넘쳐난다는 상상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아 헤매었다. 19세기 중반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사람들이 몰려든 ‘골드러시’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선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직접 금을 만들고자 한 시도가 있었다. 연금술이다. 문헌 기록만 봐도 3세기 헬레니즘 시대 말에서부터 18세기 근대 화학의 발달로 소멸하기까지 1500년을 지속했다.



연금술 하면 흔히 납을 금으로 바꾸려는 비과학적 미신이나, 어두운 실험실에서 이름 모를 용액들을 섞고 끓이는 사술을 떠올린다. 금은 원자번호 79의 원소(元素), 즉 자연계의 기본 물질이다. 다른 원소들의 화학결합으로 만들 수 있는 화합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연금술사는 허황한 사기꾼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당대의 자연철학과 세계관을 반영한 이론 위에서 다양한 재료 물질과 도구로 실험을 거듭한 과학자이자 장인 집단이었다.



독일 과학사학자 한스 베르너 쉬트의 ‘현자의 돌을 찾아서’(2000)는 연금술을 인류 지성사의 중요한 흐름으로 재조명한 책이다. 원저가 출간된 지 사반세기 만에 우리말 번역본(원저와 제목이 같다)이 나왔다. 원저는 모두 4부로 짜인 방대한 분량인데, 번역본은 각 부를 낱권으로 나누어 출간됐다.



현자의 돌을 찾아서 1~4 l 한스 베르너 쉬트 지음, 이필렬·박진희 옮김, 나남, 각 권 2만원

현자의 돌을 찾아서 1~4 l 한스 베르너 쉬트 지음, 이필렬·박진희 옮김, 나남, 각 권 2만원


쉬트는 물리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화학자였으나 역사에 흥미를 느껴 과학사로 연구 방향을 바꿨다. 이번 번역서는 그가 재직했던 베를린 공대에서 과학사를 배운 후학 이필렬 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와 박진희 동국대 교수가 공역했다. 옮긴이들은 “저자 생전에 번역본을 들고 찾아뵙겠다고 다짐했지만 작고한 지 2년이 지나서야 마무리하게 됐다”며 아쉬움을 밝혔다.



지은이는 고대 이집트의 도가니에서 현대 화학 실험실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물질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과 상상력이 어떻게 과학·종교·철학·예술을 가로지르며 전개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그는 먼저 “연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뒤 “수많은 답 중 어떤 것도(…) 의미에 딱 들어맞게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연금술 자체가 원래 경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다만 “어떤 느낌”이 말을 해준다면 “특정한 물질을 더 고귀한 존재로 만드는 예술, 그리고 질료가 조작되는 동안 그 비밀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도 고귀한 존재의 상태로 올라가게 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연금술사들은 행운의 여신에 기댄 ‘황금향’이 아니라 이성과 지식을 나침반 삼아 ‘이상향’을 좇은 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조지프 라이트, ‘인을 발견한 연금술사’, 1771, 영국 더비 미술관. 나남 제공

조지프 라이트, ‘인을 발견한 연금술사’, 1771, 영국 더비 미술관. 나남 제공


책은 연금술 발달사를 큰 줄기로 삼아 각 시대의 특징과 변화를 추적한다. 시작은 3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한 작업장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그리스·이집트의 다양한 문화가 혼융된 문명 중심지로, 그리스 자연철학과 이집트 사원의 수공예술이 결합해 연금술에 최적의 환경을 갖췄다.



지은이는 다양한 연금술 도구 중 특히 피올레에 주목한다. 둥근 유리병에 긴 목이 붙은 형상이다. 둥근 모양은 우주(코스모스)를 상징한다. 긴 목을 막으면 폐쇄된 소우주가 생기는데, 이것은 선택받지 못한 자는 접근할 수 없는 연금술의 폐쇄성을 연상케 한다.



트리비코스라는 증류장치는 유대인 여성 마리아가 발명했다는데, 머리와 몸통이 붙어 있는 형태는 자웅동체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마리아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결합하라. 그러면 너는 네가 찾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합일의 과정 없이는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지은이는 ‘둘을 가지고 하나를 만들라’는 것은 황 증기와 구리의 반응처럼 연금술의 기본 원리를 압축한 문장으로 봤다.



그리스-이집트 연금술사들은 모든 물질을 소마타(고체), 아소마타(비고체), 프네우타마(영(靈), 기운, 숨)로 나눴다. 소마타에 속한 주요 금속 7가지는 고대 천문학의 7개 행성(태양·달·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과 조응했다. 7가지 금속은 금·은·수은·구리·철·주석·납 그리고 청동(구리+주석)과 호박금(은+금)까지 9가지 중에서 선별됐다. 그런데 연금술에선 수은과 황 두 가지만을 프네우타마로 여겼다. 프네우타마는 승화(증류)될 수 있는 물질로, 다른 물질로 스며들어 색을 가진 화합물을 만들 수 있다고 봤다.



연금술을 묘사한 살로몬 트리스모신의 16세기 그림 ‘스플렌도르 솔리스’. 좌우의 우물은 모든 금속의 기본 성분인 황(붉은색)과 수은(흰색)으로 이뤄진 두 개의 물을 상징한다. 이것들은 결합 원리, 즉 검(비밀의 불)을 휘두르는 기사에 의해 하나가 된다. 투구 위 일곱 개의 별은 일곱 개의 행성과 일곱 개의 금속이다. 영국 국립도서관 소장, 나남 제공

연금술을 묘사한 살로몬 트리스모신의 16세기 그림 ‘스플렌도르 솔리스’. 좌우의 우물은 모든 금속의 기본 성분인 황(붉은색)과 수은(흰색)으로 이뤄진 두 개의 물을 상징한다. 이것들은 결합 원리, 즉 검(비밀의 불)을 휘두르는 기사에 의해 하나가 된다. 투구 위 일곱 개의 별은 일곱 개의 행성과 일곱 개의 금속이다. 영국 국립도서관 소장, 나남 제공


천한 금속이 고귀한 질료로 변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뿌리를 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질료가 물·불·공기·흙이라는 기존의 4원소설을 수용하고, 여기에 뜨거움·차가움·축축함·건조함이라는 4가지 성질을 더해 물질 형성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고대인들은 색이 질료들의 외형상 본질적 속성이라고 봤다. 연금술은 그 본연의 색을 나타내는 물질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그 과정은 납·주석·구리·철 같은 천한 금속을 화학적 가공으로 검게 하기, 희게 하기, 노랗게 하기, 자색으로 만들기 등 4단계 표준 제법으로 정리됐다. 3단계인 ‘여성적 은을 남성적 금으로’ 만든 데서 더 나아간 것은 연금술사들의 최종 목표가 금이 아니라 ‘현자의 돌’이었기 때문이다. 자색은 일종의 ‘슈퍼 금’인데, 고대 연금술사들은 붉은 보라색을 농축된 황색으로 여겼다.



7세기 이후 이슬람의 시대에도 연금술은 계속됐다.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한 서양 중세에 그리스 철학과 과학 대부분이 아랍에서 번역돼 명맥을 이었다. 11세기 시리아어로 쓰인 일종의 백과사전 ‘카우사 키우사룸(진리의 깨달음의 서)’에는 ‘황-수은 이론’을 뒷받침하는 자연철학적 논거가 제시된다. 이에 따르면 황과 수은은 태초의 4원소에서 생성된 최초의 ‘진짜 물질’이다. 그 순도와 양의 구성비, 그리고 장소·기후·열의 세기와 지속 시간에 따라 모든 금속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아랍권에선 연금술 사상 최초로 ‘금속의 변환이 가능한가’를 두고 논쟁도 벌어졌다. 그 핵심은 ‘색’이 질료와 형상의 본질적 속성인가 아닌가였다.



다비트 테니르스의 1650년작 유화 ‘연금술사’. 화로와 증류장치 등 다양한 실험 도구가 널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다비트 테니르스의 1650년작 유화 ‘연금술사’. 화로와 증류장치 등 다양한 실험 도구가 널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12세기 들어 아랍 학문이 번역을 거쳐 유럽으로 들어왔는데,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연금술도 역수입됐다. 번역 작업은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인 14세기 초까지 “열광적으로 지속”됐는데, “내적 완결성과 보편성을 지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중세 유럽 학자들의 지적 욕구를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유럽에선 ‘수은이 금속인가 아닌가’라는 오래된 논쟁이 재연됐다. 한 연금술사는 ‘제5원소’의 존재를 주창했는데,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그것이 혼과 육체 사이, 우주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한다고 봤다. 중개자로서의 제5원소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전자기파의 매질 역할을 하는 가상 물질 ‘에테르’로 이어졌다.



‘연금술사’. 피터르 브뤼헐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한 1560년 무렵의 동판화. 프러이센 문화유산 이미지 아카이브. 나남 제공

‘연금술사’. 피터르 브뤼헐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한 1560년 무렵의 동판화. 프러이센 문화유산 이미지 아카이브. 나남 제공


중세 후기 들어 유럽과 동양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귀금속 수요가 급증했다. 제후들에게 고용된 궁정 연금술사가 등장한 계기였다. 지은이는 그 뒤로도 16세기 초 의화학을 개척한 파라셀수스, 17세기 ‘알케미아’를 쓴 리바비우스, 연금술과 근대 화학의 경계인 판 헬몬트, 나아가 근대물리학의 토대를 놓은 뉴턴과 독일 문호 괴테가 연금술에 보인 관심까지 두루 설명한다. 17세기 과학혁명으로 연금술은 급속히 힘을 잃었다. 그러나 연금술과 화학은 자연의 탐구 관점이 다르다. “연금술은 복합적이고 주관적인 반면, 화학의 관점은 분석적이고 객관적이다.”(옮긴이 해제)



지은이는 연금술의 긴 여정을 살펴본 뒤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연금술사들은 결국은 실패로 끝날 연금술을 왜 그토록 긴 세월 반복했는가? 그리고 그 답을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구스타프 카를 융에서 찾는다. 융은 ‘심리학과 연금술’ 등 여러권의 연금술 관련 저서를 남겼다. 연금술은 사라졌지만, 그 상징체계는 20세기 심리학에도 영감을 준 셈이다.



지은이의 답은 이렇다. “연금술사들은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성화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의 실패를 원칙적인 실패로 느끼지 않고 외려 희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이는 유럽과 아랍뿐 아니라 중국과 인도의 연금술 대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융이 말한 ‘개성화 과정’은 개인이 무의식과 의식의 분열을 통합하며 진정한 ‘자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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