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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재난 속 그들과 얼마간 함께 있었다는 것” [이광이 잡념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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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재난 속 그들과 얼마간 함께 있었다는 것” [이광이 잡념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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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이스마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사는 10대 후반의 소년. 총상 환자다. 상처가 다섯군데나 있었다. 가장 심한 대퇴골 총상부는 세균 감염으로 고름이 나오는 상태였다. 구획절개술 이후 봉합되지 않아 환부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동시에 여러 환부가 있으면 체액과 단백질 손실이 크다. 네곳의 환부를 일차 봉합했다. 대퇴부는 강선 철사 봉합법으로 벌어진 부위를 3분의 1로 줄여 놓았다. 마취가 충분하지 않아 환자의 고통이 극심했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회복실에서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2019년 2월 다르에스살람 병원에서의 일이다.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정형외과 의사 김용민. 가자는 두번째 파견이었다. 1년 전인 2018년 긴급 파견을 다녀왔다.



이때 2년이 가자지구를 피로 물들인 ‘위대한 귀환 행진’의 시기다. 2018년은 이스라엘 ‘독립’, 팔레스타인 ‘나크바’(재앙) 70주년이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추진하면서 화약고에 기름을 부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자-이스라엘 분리 장벽 앞에서 고향으로의 귀환을 외치며 행진했다. 매주 금요일 낮 기도 후 시위가 벌어지면 이스라엘 저격병이 총을 쏜다. 담장을 오르려는 자, 혹은 앞에 선 사람을 겨냥한다. 배나 가슴을 맞으면 즉사하니, 다리를 쏜다. ‘평생 낫지 않는 심각한 손상’을 입은 환자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행진’ 기간 6106명이 이스라엘 저격병의 총에 맞았고, 223명이 숨졌다. 그 2년의 넉달 동안 김용민은 알아크샤 병원에서, 다르에스살람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담당했다.



“소록도에 부임하고 얼마 안 됐지요. 아침에 세수하고 거울을 보는데 얼굴이 이상해요. 이마가 휑해, 눈썹이 없는 거예요. 아, 걸렸나? 한센병?”



김용민은 1959년 강원도 원주, 가톨릭 집안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금수저 은수저는 아니고 스스로 ‘목(木)수저’라 했다. 박정희 때 예과를, 전두환 때 본과를 마치고,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1986년 공중보건의로 소록도에서 근무했다. 당시 소록도에는 환자 1300여명에 공보의 5명, 간호사 등 100여명이 일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간호사로 ‘큰 할매’ 마리안느 스퇴거, ‘작은 할매’ 마가렛 피사렉이 있었다.



“한센병은 말초신경 감염병입니다. 결핵 비슷한 균이 코로 감염됩니다. 약으로 치료 가능하지만 말초신경의 장애는 남아요. 예를 들면 눈꺼풀의 마비가 와요. 눈을 못 감으니 눈 뜨고 잡니다. 파리 모기가 각막에 알을 까기도 하고 손상을 주어 결국 시력을 잃게 되지요.”



눈 깜빡이는 일이 이토록 중요한 일이었나 싶다. 그래서 새 눈꺼풀을 달아줄 성형외과가 필요하다. 손발 마비가 와서 사지 말단이 떨어져 나가면, 그때는 정형외과가 필요하다. 한센병 초기는 피부과 이비인후과가 하지만 이후 절단과 봉합은 외과 몫이다.



눈썹 없는 얼굴은 꿈이었다. 소록도에 와서 두달쯤 지나면 다들 꾼다고 한다. “감염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는 거죠. 감염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극히 드물어요. 지금까지 한센병 병원 의료진 중에 감염된 사람은 없었어요. 어느 사형수에게 너 사형을 당할래, 한센병 환자랑 같이 살아볼래 하니, 당연히 살길을 택했겠지요. 둘이 한 방에서 18년을 살고, 사후 부검했는데 음성이었다는 실험 결과도 있어요.”



김용민은 소록도를 떠나던 날 두가지 결심을 한다. 하나는 전공을 정형외과로 가자, 또 하나는 남을 위해 살자. 그것이 밖에서보다 안에서 볼 때 더 아름다운 섬 소록도와 나환자 고름 짜고 똥 치우던 푸른 눈의 성자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가르쳐준 것이라 했다.



본시 장풍을 날리려면 마당부터 쓸어야 하는 법, 그는 긴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된다. 경북 포항 동국대병원에서 5년, 충북대병원에서 21년, 수부·척추 세부전공 정형외과 교수로 일했다. 그 기간 여러 해, 제자들을 데리고 소록도 봉사활동을 다녔다.



2010년 아이티에서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했다. 16만명이 숨져 21세기 최악의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된다. 전세계에서 의료진을 급파했다. 김용민은 자원하여, 한국 의료팀 일원으로 아이티에 갔다. 끝없이 밀려드는 환자들, 십중팔구 정형외과로 온다. 그 아수라장 속에 현지 의사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무너진 학교 건물 아래 사흘을 깔려 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스무살 여학생 레베카, 주 창상인 오른쪽 넓적다리를 수술했다. 피하지방의 염증을 제거하고 봉합했다. 아흐레를 수술하고 또 수술했다. 그는 첫 국외 파견으로 아이티를 다녀오면서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꼈다고 했다.



힌두교는 인생을 4단계로 나눈다. 배우고, 가족을 이루어 사회생활을 하는 전반부, 3단계가 임서기(林棲期), 마지막이 유랑기다. 떠돌다 육신을 벗는 유랑기에는 금반지를 하나 지닌다. 누군가 주검을 발견한 이가 그 반지를 빼 장례용 장작을 사기 위함이라 한다. 임서기가 특이하다. 집을 떠나 숲을 떠돌며 수행하는 시간이다. 김용민은 아이티를 다녀오면서, 나는 이제 ‘임서기’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스키점프 의료책임자를 끝으로, 정년 6년 남은 충북대병원 교수직을 사직했다. 그 길로 ‘국경없는의사회’에 첫발을 딛는다. 경계를 넘어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기치 아래 1971년 프랑스 의사들이 창립한 국제 비정부기구. 그렇게 첫 파견이 가자지구다. 이어 에티오피아 오지 감벨라에서 석달, 망고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 부러진 아이들을 치료해 주고, 다시 가자지구에 다녀오니, 2019년. 바야흐로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때다. 분쟁과 재난과 총성과 고통은 멈추지 않았지만 가는 데 2주 격리, 오는 데 2주 격리, 길은 막히고 인도주의 손길도 사실상 멈추었던 때다. 김용민은 이 기간 국립경찰병원에서 일했다.



올 3월 남수단에 다녀왔다. 2011년 독립한 아프리카 수단의 남쪽 남수단. 정부군과 반군, 군벌의 내전으로 수만명이 숨진 생지옥의 땅. “정말 무작위 난사를 하는지 열살도 안 된 꼬마들이 총상으로 몸이 망가져서 옵니다. 젊은 아버지가 아들 다리를 잘라 달라고 해요. 더위는 43도까지 치솟고, 엑스레이를 찍으면 한달 뒤에 나와요. 목발을 짚더라도 살려야죠.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술에 들어갑니다.”



올 6월 탄자니아로 갔다. 이곳은 작년에 이어 두번째다. 한해의 절반을 아프리카에서 보낸 셈이다. 충북대병원과 양해각서(MOU)를 맺은 탄자니아 대학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일이야말로 평생을 해 온 익숙한 일, 척추 수술 경험이 없는 수련의들을 데리고 도제식으로 의술을 전수했다. 하나라도 배우려는 초롱한 눈빛들, 쏟아지는 질문들, 반세기 전 우리의 모습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선생은 이 대목에서 신이 난다. 김용민은 그중 2명을 국내로 초청하여 아산병원에서 공부하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



서울 통의동 조촐한 한식집에서 만난 그에게 “보통 의사의 길에서 많이 벗어났다” 하니, “본래 의사의 길이 그런 것”이라, 어느덧 장풍을 날린다. 화엄경에 너를 좋게 함으로써 나도 좋은 ‘자리이타’(自利利他)라 하듯, 다녀오면 무엇을 얻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로 1.5㎞를 걸어 넘어오는데, 아 이제 안전지대로 나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다가도 아, 이 참혹한 현실에서 나만 홀로 빠져나왔구나, 그런 미안한 생각도 들고요. 내가 한국 의사로서 뭐 대단한 일을 했다기보다는 석달 동안 또는 얼마간, 그때 그곳에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내게 건네는 위안이고, 내가 얻는 것이겠지요”라고 했다.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는 2012년 개소하여 의사 간호사 등 6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젊은 의료인의 관심도 많고 참여가 늘고 있다고 한다. 활동비가 없는 것은 아니고 하루 6만원 정도, 한국 의사 한달 수입을 일당으로 따지면 1할 수준이다.



김용민은 자전 에세이 ‘땜장이 의사의 국경 없는 도전’과 ‘국경을 넘는 사람들’(공저)을 썼다. 얘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 참에 그가 배낭에서 칸막이가 있는 넓적한 용기를 꺼내더니 파전과 두부조림 바지락젓 같은 안주랑 찬 남은 것을 싸고, 또 길쭉한 용기를 꺼내더니 쇠고기미역국 남은 것을 담아 뚜껑을 닫고 배낭에 넣는 것이 아닌가.



남은 음식 싸 가는 의사는 처음 봤거니와, ‘일이관지’(一以貫之)는 이런 소소한 대목에서 빛난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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