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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내 영화의 파격성, 다 그로부터"...34세 화재로 떠난 천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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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내 영화의 파격성, 다 그로부터"...34세 화재로 떠난 천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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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스카라'는 성소수자라는 말조차 없었던 1995년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트랜스젠더 배우를 캐스팅한 것만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마스카라'는 성소수자라는 말조차 없었던 1995년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트랜스젠더 배우를 캐스팅한 것만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당신이 잘 몰랐던 박찬욱 감독<5>


2020년 11월 8일 오후 이무영 감독과 조영욱 음악감독, 오동진 영화평론가 등은 서울 동작구 사당동 극장 아트나인을 찾았다. 제10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에서 특별 상영되는 영화 ‘마스카라’(1995)를 보기 위해서였다. ‘마스카라’는 한국 성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한 한국 최초 장편영화다. 성전환 배우 하지나가 성전환자를 연기해 개봉 당시 더욱 화제를 모았다.

‘마스카라’는 오래도록 극장 상영이 불가능했다. 필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비디오테이프를 바탕으로 디지털로 복원해 이날 첫 공개를 했다. 이 감독과 조 감독 등은 34세에 요절한 친구 이훈(1962~1996) 감독의 유작을 극장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는 사실에 설렜다. 하지만 영화 상영이 시작되자 기대는 실망으로 변질됐다. 화질이 생각보다 떨어졌고 음향도 좋지 않았다. 비디오테이프를 기반으로 한 복원의 한계였다. 이 감독과 조 감독 등은 극장 밖을 나오며 가슴에 밀려오는 허전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영화 '마스카라'는 트랜스젠더 배우 하지나(오른쪽)가 출연해 개봉 당시 화제를 불러모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마스카라'는 트랜스젠더 배우 하지나(오른쪽)가 출연해 개봉 당시 화제를 불러모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21년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훈 감독의 어머니가 오동진 평론가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이 생전 운영했던 경기 파주시 제지공장을 정리하다 금고에서 뭔가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오 평론가가 달려가보니 ‘마스카라’ 원본 필름 1벌과 시나리오, 포스터 등이 고스란히 금고에 보관돼 있었다.

오 평론가는 이 감독과 조 감독 등에게 급하게 연락했다. 연락한 사람들 중에는 박찬욱 감독도 포함돼 있었다. 다들 놀라면서 기뻐했다. 세상을 떠난 친구가 살아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을까. 오 평론가 주도로 ‘마스카라’ 원본 필름과 자료를 영상자료원에 기증했다. 이훈 감독 딸 이재인씨 이름으로 저작권 등록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헤어질 결심’(2022) 작업과 해외 일정으로 바빴으나 마음은 오 평론가 등과 늘 함께 했다. “내 영화에 어떤 엉뚱함, 모종의 괴팍함, 썰렁함이나 파렴치함, 파격성과 특이성과 엽기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다 이훈에게서 온 것”(경향신문 2006년 9월 29일자)이라고 평가했던 친구 일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동갑내기 영화광들 모인 ‘문화 싸롱’



촬영장에서의 이훈 감독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촬영장에서의 이훈 감독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박찬욱 감독이 이훈 감독을 처음 만난 건 첫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을 연출하기 전이었다. 이종학(1989년 영화 ‘미스 코뿔소 미스타 코란도‘ 각본으로 데뷔) 작가를 통해서였다. 그는 박 감독의 서강대 친구다. 이 작가는 영화월간지 스크린 기자로 활동했고 재즈평론가로도 일했다. 이 작가는 서울 종로구 소격동 옛 프랑스문화원에서 박찬욱 감독과 이훈 감독을 처음 인사시켰다. 조영욱 감독도 함께 했던 자리였다. 앞서 이 작가는 서울음반에서 일했던 조 감독을 박 감독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과 조영욱 감독, 이훈 감독, 이 작가는 이후 프랑스문화원에서 종종 만나게 됐다. 당시 프랑스문화원은 시네필들의 안식처였다. 할리우드 영화나 한국 영화가 점령했던 여느 극장과 달리 프랑스 고전 영화와 최신 영화들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남은 박 감독의 친구가 홍익대 인근에서 운영하던 카페 ‘라이프’로 이어졌다. 각자의 지인들이 하나둘 ‘라이프’ 모임에 끼어들었다. 이무영 감독과 윤태영 감독, 오동진(당시 문화일보 기자) 평론가, 이재순 프로듀서(‘복수는 나의 것’과 ‘클래식’ 등 제작)가 함께 모이고는 했다.

대화 주제는 당연하게도 영화와 음악이었다. 박 감독은 “(‘달은… 해가 꾸는 꿈’ 이후 ‘삼인조’를 연출하기 전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며 “우선 새로운 친구들을 좀 사귀었는데, 그 중 이훈이란 자가 날 많이 바꿔놨던 것 같다”고 저서 ‘박찬욱의 몽타주’(2005년 마음산책 발행)에서 돌아봤다.

이훈 감독은 16㎜ 장편영화 ‘달콤한 포로’(1993)를 연출한 데 이어 ‘마스카라’를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감독 데뷔식을 치렀다. 그는 두 영화에서 촬영과 각본까지 도맡았다. 박찬욱 감독은 ‘마스카라’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좋.댓,구’(2023) 포함 박 감독의 유이한 영화 출연이었다.


이훈 감독은 모임에서 대화를 주도할 때가 많았다. 미국 오하이오대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미국 B무비에 해박했다. 상업영화나 영화제 수상 예술영화 정도만 접할 수 있었던 국내파 영화광들에게 이훈 감독의 말이 신기하게 느껴질 만했다. B무비 비디오테이프를 다량 보유하기도 했던 이훈 감독은 영화의 저수지 같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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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① 당신이 잘 몰랐던 박찬욱 감독
    1. • 초보 감독 박찬욱에게 주연 배우가 던진 질문 "영화 줄거리가 뭐죠?"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1502520001939)
    2. • “내가 추천한 영화 재미없다고 발길 뚝” 비디오점 운영 실패에 유학 고민 ‘박찬욱의 시련’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2512130001927)
    3. • ‘JSA’ 대신 ‘아나키스트’ 메가폰 잡았다면… 박찬욱 운명 가른 일주일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3012450005344)
    4. • 단편영화 한 편이 '히치콕 숭배자' 박찬욱의 영화인생을 바꿨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131100000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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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