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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606] 물방울로 쓴 詩

조선일보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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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606] 물방울로 쓴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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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물방울, 1978년, 크래프트지에 수채 물감, 73×60cm, 개인소장.

김창열, 물방울, 1978년, 크래프트지에 수채 물감, 73×60cm, 개인소장.


이것은 물방울이 아니다. 화가 김창열(金昌烈·1929~2021)의 물방울 그림이다. 하지만 작품 앞에 서면 무릎을 치게 된다. 물방울은 틀림없는 그림인데, 종이는 마치 진짜 물이 스몄다가 마른 듯 울어 있다. 수채 물감으로 그려낸 물방울이니, 종이는 실제로 물을 머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색 크래프트지(紙) 위를 주르륵 흘러내려 동그랗게 맺힌 영롱한 물방울과 그 아래 젖은 종이의 진한 얼룩은 붓 끝에서 빚어진 환영이다. 김창열의 물방울에서는 이처럼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간극이 좁아진다.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월남해 그림을 배웠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곧 전쟁이 일어나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중학교 동기 120명 중 6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결코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어두운 물감을 화면에 거칠게 올리고 파괴적인 붓질로 그 표면을 가르고 찢어내듯 헤집었다 다시 덮어 주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의 추상화는 전쟁터에서 숱하게 봐야 했던 상처와 죽음의 잔상이었다.

김창열이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 때는 1970년, 파리의 혹독한 겨울이었다. 바람이 들이치는 허름한 작업실에서 캔버스 뒷면에 맺힌 물방울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작고 여리고 맑은 물방울은 금세 화폭에 스며들어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그래서 감동적이었는지 모른다. 이후 김창열은 거의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물방울을 그리며 기나긴 시간을 견뎠다. 고통과 울분, 두려움과 혼란, 그리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임과 죄책감을 모두 여린 물방울에 담았다. 그의 물방울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던 화가가 물감으로 쓴 시다.

김창열의 2013년 작 ‘회귀’. 천자문 위에 물방울이 영롱하게 맺혀있는 작품이다. 다섯 살 무렵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운 김창열은 유년 시절 습자지에 글자를 쓰던 기억을 되살리듯 화면을 천자문으로 촘촘히 채우고, 단정한 서체 위에 물방울을 배치했다. 200×500cm. 개인 소장./국립현대미술관

김창열의 2013년 작 ‘회귀’. 천자문 위에 물방울이 영롱하게 맺혀있는 작품이다. 다섯 살 무렵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운 김창열은 유년 시절 습자지에 글자를 쓰던 기억을 되살리듯 화면을 천자문으로 촘촘히 채우고, 단정한 서체 위에 물방울을 배치했다. 200×500cm. 개인 소장./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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