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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명 학살한 ‘개발독재자’ 수하르토, 결국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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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명 학살한 ‘개발독재자’ 수하르토, 결국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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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정부가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게 국가 영웅 칭호를 부여한 10일 자카르타에서 이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한 이가 “수하르토는 영웅이 아니다”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인도네시아 정부가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게 국가 영웅 칭호를 부여한 10일 자카르타에서 이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한 이가 “수하르토는 영웅이 아니다”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집권 시기 수십만영을 학살한 것으로 악명 높은 독재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 대해 “국가 영웅 칭호”를 끝내 부여했다. 역사 왜곡이며 희생자의 아픔을 외면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라보워 대통령은 옛 장인이 영웅이라는 주장을 꺾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영문 신문 자카르타 포스트는 프라보워 대통령이 국가 영웅의 날인 10일 자카르타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을 포함한 10명에 대해 국가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행사장에서는 사회자가 “독립 투쟁의 영웅이었던 수하르토 장군은 독립 시대 이래로 두드러진 존재였다”고 말했다고 영국 가디언은 전했다. 문화부 장관은 수하르토 시대 경제 발전을 눈여겨봐야 하며 인권유린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집권 시기 인도네시아 경제는 연 평균 7% 성장했으며, 현대 인도네시아에 깊은 영향과 상처를 동시에 남겼다.



수하르토의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 투쟁 이력에는 논란이 있다. 그는 원래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하던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일본군 휘하에 들어갔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네덜란드가 식민지배를 다시 시도하자 그는 독립군으로 변신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뒤 군 고위 장교로 출세한 그는 1965년 군 내 격렬했던 좌우대립 과정에서 권력을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독립 영웅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권력을 빼앗아 1967년 대통령 권한 대행에 올랐다. 수하르토가 권력을 장악하는 이 과정에서 적어도 30만~100만명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듬해 1968년 3월21일 수하르토는 마침내 대통령에 공식 취임했다. 수하르토는 냉전이 한창인 시기 반공을 앞세운 ‘신 질서’를 선언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철권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일어난 1998년 민주화 운동으로 실각할 때까지 32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철권 통치했다. 그의 가족은 각종 이권 사업에 관여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수하르토의 둘째 딸은 촉망받던 육군 장교와 결혼을 했는데 그가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이다. 수하르토 정권 시절에 승승장구해 코파수스 특수부대 사령관에 올랐으며, 이 특수부대가 수하르토의 정적을 납치·고문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 1988년 불명예 제대했다. 같은해 수하르토의 딸과 이혼했다. 자신은 기소되지 않았으나, 부하들 몇몇은 혐의가 인정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몇 년간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한 뒤 2008년 초 귀국해 정계에 뛰어들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은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조코 위도도 전 대통령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독재 정권의 협력자 이미지를 희석하는데 성공했고, 지난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러닝 메이트가 조코 위도도 전 대통령의 아들인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였다.



독재자의 사위였던 대통령이 독재자를 국가 영웅으로 끝내 예우한 것에 대해 엠네스티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의 권위주의 정권이 저지른 죄를 세탁하려한다”며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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