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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렌코의 베를린필, 틸레만의 슈타츠오퍼… 볼 것 넘치는 ‘유럽의 뉴욕’

조선일보 김기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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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렌코의 베를린필, 틸레만의 슈타츠오퍼… 볼 것 넘치는 ‘유럽의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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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도시 베를린을 가다
베를린 중심가 운터 덴 린덴 거리 복판에 자리잡은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일 트로바트레' 주연을 맡은 러시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출연에 항의하는 우크라이나 지지 시위가 벌어졌다. /김기철

베를린 중심가 운터 덴 린덴 거리 복판에 자리잡은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일 트로바트레' 주연을 맡은 러시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출연에 항의하는 우크라이나 지지 시위가 벌어졌다. /김기철


극장 앞이 어수선했다. 지난 5월 하순 베를린 중심가 운터 덴 린덴 거리 복판의 슈타츠오퍼 극장. 총탄 흔적이 역력한 앰뷸런스 주변에 우크라이나 국기와 피켓을 내걸고 대여섯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날 공연하는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여주인공 레오노라 역을 맡은 러시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때문이었다.

당대 최고 소프라노로 꼽히는 네트렙코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지지하는 등 대표적 친푸틴 예술인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뉴욕, 빈 등 서구 대표적 오페라 무대에서 쫓겨났다.

한 집회 참가자는 “오페라 공연 자체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네트렙코는 러시아 국민이지만 동시에 유럽 시민으로서 책임도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극장까지 번진 우크라이나 전쟁

극장 안은 또 다른 분위기였다. 만하임 극장 음악감독 출신 마흔세 살 지휘자 알렉산더 소디는 시작부터 박진감 넘치는 베르디 음악을 들려줬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30년 넘게 조련한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필 못지않은 연주력을 자랑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1300석 슈타츠오퍼 극장은 빈(1700석)이나 뮌헨(2100석)보다 객석 수가 적기 때문에 몰입감도 컸다. 연출가 필립 슈퇼츨은 벽을 레고 조각처럼 이동시키면서 영상을 비춰 다양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주인공은 역시 네트렙코였다. 잘츠부르크, 독일 바덴바덴, 뉴욕, 이탈리아 베로나 같은 대형 무대에선 느낄 수 없는 에너지를 발산했다. 이 시대 최고의 소프라노답게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폭발적 성량과 연기력이 압권이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 '일 트로바트레'. 러시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여주인공 레오노라를 맡았다. 오른쪽은 2013년 루나 백작으로 나선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으로 출연했다. Berlin Staatsoper/Matthias Baus

베를린 국립오페라 '일 트로바트레'. 러시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여주인공 레오노라를 맡았다. 오른쪽은 2013년 루나 백작으로 나선 플라시도 도밍고. 바리톤으로 출연했다. Berlin Staatsoper/Matthias Baus


중국 테너 롱롱의 발견

전날 본 구노 ‘로미오와 줄리엣’도 오케스트라부터 활력이 넘쳤다. 오페라에 특화된 오케스트라의 경쟁력이 돋보였다. 조지아 소프라노 니노 마차이제는 2008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줄리엣을 불러 스타가 됐다. 푸른색으로 물들인 머리와 티셔츠, 청바지는 40대 중반 소프라노가 소화하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하지만 풍부한 성량과 연기력은 볼만했다. 로미오 역 중국 테너 롱롱의 발견도 수확이었다. 싱싱하고 풋풋한 목소리로 지칠 줄 모른 채 무대를 누볐다.


‘서베를린의 자존심’ 도이체오퍼

베를린 서쪽 비스마르크가 35번지 도이체 오퍼 극장은 분단 시절 동베를린에 자리 잡은 슈타츠오퍼, 코미셰오퍼에 맞선 서독의 문화적 자존심이다. 베를린 체류 셋째 날과 넷째 날은 ‘돈 카를로’와 ‘안드레아 셰니에’를 봤다. 2009년부터 음악감독을 맡아온 도널드 러니클스는 오케스트라를 능숙하게 이끌었다.

미국 테너 조너선 테텔만(37)은 당당한 체격에 힘 있는 목소리로 돈 카를로를 불렀다.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그를 캐스팅하려고 애쓰는 이유를 알 만했다. 로드리고 역 바리톤 김기훈이 테텔만과 부른 이중창은 ‘돈 카를로’의 백미. 두 사람의 우정과 신뢰를 다짐하는 아리아는 관객들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취리히 출신 연출가 마르코 아르투로 마렐리의 무대와 의상 디자인은 훌륭했다.

‘안드레아 셰니에’는 실망스러웠다. 일흔한 살 테너 그레고리 쿤데와 쉰여섯 소프라노 손드라 라드바노프스키는 이 작품을 맡기엔 나이 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나는 군인이었소’ 같은 결정적 아리아에서 힘이 달렸다.


오페라 극장 3곳, 오케스트라 전국(戰國) 시대

인구 360만 도시 베를린에선 오페라 극장 3곳이 매일같이 다른 프로그램을 올리며 경쟁한다. 베를린 슈타츠오퍼, 도이체 오퍼, 코미셰 오퍼다. 키릴 페트렌코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바렌보임에 이어 2023년부터 사령탑을 맡은 틸레만의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비롯, 여성 지휘자 요아나 말비츠의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유롭스키의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등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이 버티고 있다. 덕분에 유럽 어느 도시보다 저렴한 가격에 최고 수준의 오페라, 콘서트를 볼 수 있다.

카라얀, 아바도, 래틀이 다지고 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베를린 음악 기행의 핵심이다. 이 도시에 갈 때마다 베를린 필 스케줄부터 챙기는 이유다. 베를린 필 공연 티켓은 공연 두 달~다섯 달 전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매진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상임 지휘자 페트렌코 공연은 늘 매진이기 때문에 홈페이지를 들락날락거리며 반환 티켓이 나오는지 확인해야 한다.

클래식 본고장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는 젊은 음악가들을 만나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악장 이지윤, 부악장 박규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악장 김수연과 플루트 수석 김수빈,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바순 수석 유성권, 베를린 필 종신 단원 비올리스트 박경민 등이다.


독일 최대 기독교 예배당인 베를린 돔(오른쪽)은 알테 무제움 등 주요 박물관 5곳이 모인 '박물관 섬'의 랜드마크다./김기철

독일 최대 기독교 예배당인 베를린 돔(오른쪽)은 알테 무제움 등 주요 박물관 5곳이 모인 '박물관 섬'의 랜드마크다./김기철


실크로드 유물의 정수 훔볼트포룸

베를린에는 운터 덴 린덴의 박물관섬만 있는 게 아니다. 베를린 돔 건너편 훔볼트 포룸은 2021년 개관한 초대형 박물관. 동독 시절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리던 공화국 궁전을 철거하고, 바로크 양식의 옛 베를린 궁을 복원했다. 3층 아시아미술관의 실크로드 유물은 방대하면서도 수준 높은 컬렉션을 자랑한다. 쿠차 키질 석굴을 통째로 옮겨 복원한 전시실이나 네스토리우스교와 마니교 관련 진귀한 벽화는 압도적이다. 실크로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필수 코스다.

베를린 필 상주홀인 필하모니홀/김기철

베를린 필 상주홀인 필하모니홀/김기철


베를린 필 상주홀인 필하모니 근처 쿨투어포룸엔 독일 최고 미술관으로 꼽히는 국립회화관과 신국립미술관이 있다. 베를린 중앙역 근처 함부르크 반호프 미술관은 앤디 워홀, 요제프 보이스 작품이 전시된 현대미술관이다. 마침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이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기획전을 열었다. 미래에서 온 듯한 오토바이 택배 기사가 서울 마포와 강변도로를 질주하는 영상과 함께 한국어 대사가 흘러나왔다. 영어 자막 도움을 받아 영상을 감상하는 베를린 관객들을 보면서 뿌듯했다.

‘장벽의 도시’였던 베를린은 통일 이후 음악, 미술, 영화, 건축, 디자인 각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는 매력 만점의 예술 도시로 탈바꿈했다. 제2의 뉴욕, 파리로 불릴 정도다. 한 달 내내 낮에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고, 밤마다 오페라와 콘서트를 다녀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나혜석은 100년 전 전차, 버스, 택시, 지하철이 쉼 없이 오가던 베를린에서 ‘과학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지금 운터 덴 린덴 거리엔 예술의 향기가 흐른다.

[김기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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