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박성덕의 부부 마음길]
빈둥지증후군에 방전된
부부의 애착 관계 회복
[박성덕의 부부 마음길]
빈둥지증후군에 방전된
부부의 애착 관계 회복
일러스트=유현호 |
Q.명문대에 입학해 같은 과 선배였던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남편 사업이 잘 풀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두 아들도 잘 자라 각자 가정을 꾸렸어요.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이지만 우울하고 공허합니다. 남편은 젊었을 때 일이 바빠 집을 자주 비웠어요. 저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며 가정을 지켰어요. 그때는 남편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제 자리는 뒷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힘들다고 해도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넘깁니다. 그렇다고 남편과 헤어지기는 싫어요.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혼이라는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거든요.
A.인간에게는 외부에서 오는 자극과 내부로부터 오는 자극이 있습니다. 힘든 상황을 목격할 때 고통을 겪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입니다. 내적인 경험 또한 강한 자극이 됩니다. 전문가들은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자극이 내부로부터 온다고 합니다. 내면 상태의 안정이야말로 행복을 결정짓는 훨씬 중요한 조건인 셈입니다.
상담을 의뢰한 가정은 먼저 애착 관계가 작동되지 않아서 고통이 찾아온 것입니다. 애착 대상은 어린 유아나 아동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애착 이론을 만든 영국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존 보울비 박사는 인간이 힘들고 슬프고 아프고 위기에 닥쳤을 때, 다가가서 위로받을 애착 대상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가가서 위로받고 기댈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보울비 박사는 힘들 때 타인에게 기대는 것이 나약함이나 의존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해지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와 연결될 때 강해지고 빠르게 안정감을 찾고 자율성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위 부부는 일과 가사, 육아를 하면서 힘들 때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해야 했습니다. 충전하지 않고 오랫동안 방전만 된 배터리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부모와 배우자 같은 애착 대상과 연결돼야 방전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부는 그러지 못하면서 모두 지쳐버린 상황입니다.
또 이 가정은 심한 ‘빈둥지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빈둥지증후군은 자녀가 성장해 독립한 뒤 부모가 느끼는 공허한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직업까지 포기하고 자녀에게 헌신한 여성에게 이러한 현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빈둥지증후군은 자녀가 대학 진학이나 유학으로 집을 떠나는 경우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 식욕 부진 및 수면 장애를 경험하고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해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가볍게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갱년기와 혼동해 적절히 대처하지 않으면 심한 우울증과 고립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빈둥지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아내는 자신의 희생으로 잘 자란 아이들이 떠난 뒤 더 이상 역할이 없어졌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동안 가정을 위해 쏟은 노력과 배려가 자녀가 성장해 자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빈둥지증후군에서 벗어나려면 자녀의 독립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자연스럽고 건강한 과정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 나의 희생·사랑으로 자녀가 건강한 삶과 가정을 이뤄갈 수 있게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자녀들 역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주 대화하며 지지하는 태도와 감사의 말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족을 위해 미뤄두었던 운동이나 취미 생활, 지인과의 만남, 종교 활동 등 공동체 모임에 나가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떠나기 전부터 일상에서 새로운 활력을 위한 활동을 찾는 게 좋습니다. 만약 흥미를 잃고 심한 우울증과 상실감이 오래 지속되면 약물 처방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족과 지금 겪고 있는 힘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애착 관계의 회복은 빈둥지증후군 극복에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부부 관계도 새롭게 재편돼야 합니다. 빈둥지증후군으로 우울감이 심한 아내뿐 아니라 오랜 시간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해 온 남편 역시 위로가 필요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도 사업하면서 많은 힘든 일을 겪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고통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내의 고통을 충분히 받아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하는 하소연이 자신이 겪은 것에 비하면 작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아내가 힘들다고 말할 때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아내의 우울감과 단절감이 깊어지고 ‘빈 둥지’의 상실감이 더욱 커집니다. 남편은 자신이 겪은 힘든 시간을 아내와 나누면서 풀어가야 합니다.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참고 지내다 보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아내가 겪는 고통 역시 결코 가볍지 않기에 따뜻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이 부부와 유사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사례를 자주 봅니다. 상담을 통해 내면의 아픔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비슷한 상황에 처한 부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출근길에 차를 몰고 가다가 확 꺾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저도 많이 힘들었거든요. 사업하면서 온갖 수모를 겪어 정말 벼랑 끝에 선 느낌이 많이 들었거든요.” 아내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저는 늘 외로웠어요. 아이는 잘 자라고 경제적으로 안정됐지만 혼자라는 느낌이 떠나지 않았어요.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이렇게 깊은 마음을 드러내면서 부부는 비로소 배우자의 아픔을 보기 시작했고, 서로 위로하며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부부 간의 유대감을 경험하면서 힘을 얻습니다. 부부가 마음을 터놓고 고통을 나누며 위로하는 시간이야말로 빈둥지증후군과 애착 부재로 생긴 고통을 치유하는 강력한 해독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진심 어린 위로를 받을 때 남편도 아내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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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덕 연리지가족부부연구소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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