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1일 일본 교토의 고찰 쇼렌인에서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 기록이 담긴 고문헌 ‘관세음응험기’ 실물이 처음 한국 관계자들에게 공개됐다. 정헌율 익산시장을 비롯한 시 관계자들과 문화유산 전문가들이 문헌을 실견하면서 쇼렌인 주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익산시 제공 |
주지 스님이 작은 오동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가 상자에서 꺼낸 건 낡은 두루마리였다. 1천년 가까이 절에서 보물처럼 보관해온 두루마리 표면에 여섯글자 제목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觀世音應驗記’(관세음응험기). 이를 지켜보던 전문가들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7월1일 오전 일본 교토 시내 동쪽 히가시야마 산록에 자리한 고찰 쇼렌인(청련원) 접견실에서 백제 천도 비밀을 간직한 고문헌 ‘관세음응험기’의 실물을 한국 관계자들이 처음 실견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한국에서 날아온 정헌율 익산시장과 최완규 전 원광대 교수, 최연식 동국대 교수 등은 펼쳐진 두루마리의 내용을 주지 스님의 안내로 하나하나 살펴보며 진중하게 검토했다.
이 고문헌은 1970년 일본 교토대학의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관세음응험기의 연구’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한국 역사학계에서 유명해졌다. 이 고문헌에 백제 무광왕(무왕, 재위 600~641)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마키타 교수가 당시 익산 유적 연구에 골몰하던 한국 문화재학계 거두 황수영 박사에게 알린 것이 계기가 됐다.
지난 7월1일 공개된 ‘관세음응험기’의 앞부분. 학계 관계자 제공 |
‘관세음응험기’는 11~12세기 일본 가마쿠라 시대 왜승들에 의해 필사돼 쇼렌인에 1천년 가까이 보관돼온 낯선 책이다. 기독교로 치면 일종의 신앙간증집으로, 관세음보살의 영험담을 모은 픽션풍의 이야기 모음집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에 편찬된 세 종류의 관음 신앙 관련 영험담을 합친 것인데, 부량(374~426)의 ‘광세음응험기’ 7편, 장연(5세기 전반)의 ‘속광세음응험기’ 10편, 육고(459~532)의 ‘계관세음응험기’ 69편이 있고, 여기에 백제와 관련된 부록 2편이 더해졌다. 이 부록의 한편 제석사조에 무왕의 익산 천도와 천도 이후 왕실사찰로 제석사를 건립했는데 불에 타 복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른 사서에 나오지 않는 익산 천도의 비사를 담고 있어 주목받게 된 것이다. 특히 충남 공주·부여와 더불어 백제의 고도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미륵사 터와 쌍릉 등의 유적을 보유한 전북 익산의 시민들은 이 불교 문헌을 고향의 역사를 전하는 소중한 비전으로 인식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지난 7월1일 쇼렌인 쪽이 공개한 ‘관세음응험기’의 중간 부분을 펼친 모습. 학계 관계자 제공 |
이날 익산시장 등 시 관계자들과 최연식·최완규 교수 등 불교사 연구자들이 교토에서 ‘관세음응험기’를 처음 실견한 건 한국 연구자 최초의 본격적인 현장 조사였다. 연구자들은 지난달 22일 익산에서 다시 모여 ‘익산 ‘관세음응험기’를 논하다’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열었는데, 그동안 전혀 몰랐던 새로운 분석 결과를 쏟아내 관심을 끌었다.
이 고문헌을 둘러싼 가장 큰 수수께끼는, 책 자체가 원래 중국의 관세음 신앙 간증 문헌인데 왜 백제 편이 뜬금없이 추가됐고, 언제 누구에 의해 추가됐는지로 집약된다. 이에 대해 불교사 연구자인 최연식 교수는 ‘관세음응험기’ 실물 검토와 비슷한 신앙 체험 내용이 담긴 다른 고문헌 대조 등을 통해, 대체로 7세기 말께 백제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 남긴 익산 천도와 제석사 관련 기록을 신앙의 이적으로 보고 책 말미에 덧붙여 채록하면서 남겨진 게 아니냐는 결론을 제시했다. 소현숙 원광대 교수도 부록의 제석사조가 ‘관세음응험기’ 전체 내용과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들어간 배경에 대해 수나라 때 영험담을 모은 책들의 구성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동시기 백제의 조정에서 편찬한 관찬사서 같은 곳에 실린 내용을 담아 남긴 것이란 해석도 내놓았다. 지금까지 실물 분석을 통해 이런 식의 추론을 끌어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물꼬를 튼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지난 7월1일 공개된 ‘관세음응험기’의 말미 부분. 학계 관계자 제공 |
‘관세음응험기’에 639년 익산 제석사에 비와 번개가 몰아쳐 낙뢰로 건물들이 불탔다는 기록이 있는 것과 관련해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의 오현덕 연구사가 과학적으로 검증해 그런 사실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조사 보고도 나왔다. 제석사 목탑에 낙뢰가 내리쳐 발생한 흔적이 실제로 있는지를 자력탐사 방식으로 살펴봤더니, 자화 현상이 발생한 흔적이 목탑 터와 심초석에서 뚜렷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오 연구사의 논고는 ‘관세음응험기’ 기록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증명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관세음응험기’에서 백제왕실의 사찰로 언급한 익산 제석사 터에서 나온 동물 형상의 악귀상. ‘개구리 왕눈이’를 떠올리게 하는 익살스러운 모양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
익산시 쪽은 지난 7월 쇼렌인 방문 때 절 쪽에 유산 교류 의향을 전달하면서 훗날을 기약했다. 절 관계자들은 익산시민과 연구자들이 자기네 사찰에 소장된 고문헌에 뜨거운 관심을 갖고 있다는 데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쇼렌인은 가을 단풍철 밤에 경내 정원을 개방해 푸른빛 야간 조명을 펼치는 관광명소다. 이 고찰이 백제 고대사의 비밀을 밝히는 역사 교류의 끌차로도 구실하기를 기대해본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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