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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는 허상…한국, 잠재적 핵국가로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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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는 허상…한국, 잠재적 핵국가로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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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좋은 담장, 좋은 이웃’을 펴낸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이제훈 선임기자

최근 ‘좋은 담장, 좋은 이웃’을 펴낸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이제훈 선임기자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장관은 “앞으로 상당 기간 한반도에 ‘두 개’의 전혀 다른 국가가 존재할 것”이라며 “협상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는 도달 가능성이 없는 허상”이라고 강조했다. 송 전 장관은 “핵을 보유한 북한을 상대하는 한국의 생각은 바뀌어야 한다”며 “통일이라는 이상은 우선 선반에 올려두자”고 했다.



그는 지금 한국사회에 ‘통일’과 ‘비핵화’는 일단 잊자고 제안한 것이다. 통념을 흔드는 논쟁적인 화두다. 아무도 하지 않던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제안자의 이력이다. 그는 1975년 외무부에 들어가 2008년 2월 외교통상부 장관을 마칠 때까지 34년간 한국외교의 최전선을 지켰다. 소파(SOFA·주둔군지위협정) 개정, 방위비 분담금 협정 체결 등 한-미 동맹의 기반을 다지는 데 참여했고, ‘동북아 탈냉전 청사진’으로 불린 2005년 6자회담 9·19공동성명의 산파 구실을 했다. ‘비핵·평화 한반도’의 청사진을 그린 당사자의 ‘통일과 비핵화는 잊자’는 제안은 그 무게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새책 ‘좋은 담장, 좋은 이웃’(생각의 창) 출간을 계기로 지난달 29일 남산자락 개인 연구실 근처에서 만난 송 전 장관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식당과 카페를 오가며 함께한 2시간 남짓 동안 쉴새 없이 그간 벼린 생각을 쏟아냈다.







송 전 장관이 최근 펴낸 책.

송 전 장관이 최근 펴낸 책.


‘좋은 담장, 좋은 이웃’은 2016년 내놓은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창비) 이후 9년 만의 신간이다. ‘빙하는 움직인다’가 세금으로 먹고산 34년간 공직 생활의 경험·고민을 기업이 회계보고하듯 한국사회에 공개한 ‘과거’와 관련한 보고라면, ‘좋은 담장, 좋은 이웃’은 한국사회의 미래를 밝히고자 내놓은 화두다. “안보와 통일 12개의 질문”이라는 부제가 명확히 밝히고 있듯이 그는 대한민국호의 미래를 열어가는 데 꼭 필요하다 싶은 12개의 질문을 추렸고, “‘평화·번영·통일’이라는 국가적 염원을 향해 가는 토론”의 마중물 삼아 그간의 연구와 고민을 응축한 자신의 의견을 먼저 밝혔다.



새책의 제목은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라는, 로버트 프루스트가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쓴 시구에서 따왔다. 그는 지금 한국사회에 절실한 건 ‘평화’보다 ‘안정’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북한을 포함한 주변국과 갈등·충돌 없이 공존하려면 ‘마당을 열 때’가 아니라 ‘좋은 담장을 쌓아야 할 때’라고 본다. 담장을 잘 쌓아야 “국가정책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할 수 있다”, 그래야 ‘좋은 이웃’을 둘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좋은 이웃’에 북한도 포함된다. 북한을 ‘동포’가 아닌 ‘이웃’으로 여기고 상대하자는 그의 인식과 제안은 문제적이다.



그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근본엔 ‘북핵 문제’가 본질적으로 달라졌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는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형 시험발사에 성공한) 2017년 말 북한이 핵국가로 등장했다”고 단언했다. 북한이 그때를 기점으로 “사용가능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됐다는 점에서, 기독교 성경 속 인류가 선악과를 먹기 전과 뒤의 차이 만큼이나 “한반도라는 세상을 다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제 북한의 핵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이고,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리라는 기대는 ‘연목구어’(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일처럼 불가능한 것을 바람)다.



그는 탈냉전 30년여간 역대 한국 정부가 견지해온 ‘따뜻한 평화’(적극적 평화), 곧 ‘교류협력-비핵화-평화체제-통일’의 경로가 벽에 부닥쳤다고 본다. 하여 이제는 ‘차가운 평화’(소극적 평화), 곧 ‘분단현실의 인정-힘의 균형-안정과 공존’을 우선 지향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달리 말하면 “대북 억제와 봉쇄를 결합한 태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긴장완화와 위험축소를 병행”하자는 것이다.



그는 “지금처럼 한국이 미국과 북의 핵 사이에 이뤄지는 균형을 믿고 생존”하는 건 “가지에 매달린 열매처럼 취약한 안보구조”라고 단언한다. “북이 핵을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한 한국은 미국한테 쭈그러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국이 “국가안보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미국은 “‘나부터 살겠다’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있다. 그가 보기에 미국이 한국에 펼친 핵우산을 언제 거둬들일지, 핵우산의 비용이 언제 감당 불능한 수준으로 치솟을지 알 수 없다.



하여 한국이 ‘잠재적 핵국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게 그의 핵심 제안이다. ‘잠재적 핵국가’란 “핵 비확산(NPT) 체제 안에서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을 이미 갖춰 결정만 하면 단기간에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나라”를 뜻한다. 핵연료주기를 완성해 결심만 하면 6개월 안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과 독일 같은 나라 말이다.



그가 보기에 ‘대한민국을 잠재적 핵국가로’라는 대한민국호의 항로 변경은 한반도를 덮친 “각자도생의 ‘신세계’”에 표류하지 않을 “국가정책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하는 핵심 수단이다. 그를 통해 여전히 ‘의존형’인 한미 동맹을 ‘자립형 동맹’으로 재정립하고, 북한을 상대로는 “‘공존과 억제’의 과정을 거쳐 ‘힘의 승패’ 단계에 이르게 되는 ‘키신저의 데탕트’ 효과”를 염두에 두자고 한다. 그가 북을 ‘동포’가 아닌 ‘정상적 이웃’으로 대하자며 통일을 “쟁취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다가올 수 있는 결과”로 설정하자고 제안하는 까닭이다. ‘자립형 동맹’으로 거듭나자면 미국이 움켜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당연히 이뤄져야 한다.



송 전 장관은 2022년 10월부터 지난 3년여간 “생각을 종이에 앉히는”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새 책은 그 고통의 산물이다. 그는 “지금은 물론 상당히 먼 미래에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을 생각할 때 최선의 길이라고 믿을 뿐”이라고 ‘책 머리’에 적어놨다. 이제 토론을 해야 할 시간이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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