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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아인협회 갑질에 반기 든 지회장들…법정 간 ‘반대파 솎아내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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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아인협회 갑질에 반기 든 지회장들…법정 간 ‘반대파 솎아내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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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농아인협회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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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아인협회는 수어를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공동체예요. 이 협회에서 배제된다는 건 농아인 분들에겐 국적을 박탈당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거기서 벗어나면 사회생활 자체가 어려워지다 보니 협회 지도부에 문제가 있어도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ㄱ씨가 농인인 어머니의 쉽지 않은 결단을 설명하며 말했다. ㄱ씨 어머니를 비롯해 농아인협회 지회장 겸 수어통역센터장을 맡았던 10명은 지난 4월부터 협회 지도부와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농인들의 ‘거의 유일한 공동체’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딛고 지도부에 ‘반기’를 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나서야 했다. 농인으로 살며 유일하게 기댈 곳인 협회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컸다.



지회장들이 소송을 낸 배경은 농아인협회를 둘러싼 지도부의 ‘갑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협회 중앙회 일부 임원이 전국 각지의 협회장·지회장들을 대상으로 “은혜도 모르는 xx” 따위 욕설과 폭언을 했고, 협회 행사에 참여할 때 감사의 의미로 돈을 걷기까지 했다는 게 지회장들의 설명이다. 지난 9월까지 직을 유지했던 협회의 전 사무총장은 국외연수를 가게 된 농인들에게 “협회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보답해야 한다”는 취지로, 양주 밀반입 등을 요구한 정황이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 과정에서 폭로되기도 했다. 면세 한도를 초과한 양주를 사오게 한 뒤 국내에서 되판 것인데, 2022~2024년까지 최소 6차례에 걸쳐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농아인협회의 참혹한 실상에 일부 지회장들은 지도부의 ‘반대파’에 섰다. 소송에 나선 지회장 10명도 협회 운영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이다. 지난해 말부터 농아인협회는 이들이 겸직하고 있던 수어통역센터장의 ‘공개 채용’을 공지했다. 농아인협회는 중앙회 밑에 시·도별 협회와 산하 시군구별 지회를 두고 지역별로 수어통역센터를 운영하는데, 그간 결격 사유가 없다면 지회장이 겸직해왔던 지역 수어통역센터장을 새로 채용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도부를 비판하는 반대파 지회장을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됐다. 지회장들은 대개 수어통역센터장으로 받는 월급을 더해 생계를 유지한다.



반대파 지회장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한 공개채용 면접에서 협회의 의도는 한층 명확해 보였다. 면접 질문에는 ‘협회 중앙회 지도부 선거에서 누굴 뽑았냐’ 등이 포함됐다고 한다. 지도부와 가까운 이들에게는 형식적인 면접이 이뤄진 반면, 반대파로 낙인 찍힌 지회장들에게는 장애인복지법의 구체적인 조문을 물어보기도 했다는 게 이들 주장이다. 전체 226개 시군구 지회장 가운데 협회 지도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지닌 15명이 센터장 공개채용에서 탈락했다.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등에 대한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등에 대한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회장들은 공개채용이 애초부터 ‘반대파 솎아내기’에 목적을 뒀다며 협회를 상대로 ‘수어통역센터장 임명 무효확인’ 소송을 냈다. 지회장들을 대리하는 곽정민 변호사는 “공개채용을 명분 삼아서 ‘현재 집행부를 찬성하느냐’ ‘지난 선거에서 누구를 뽑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는 업무 적격성과는 무관한 질문”이라며 “공개채용 절차는 집행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배제하려는 명분”이라고 말했다. 반면 농아인협회를 대리하는 김근진 변호사는 “정부 정책에 따라 공개채용을 진행하지 않으면 국가에서 나오는 보조금이 환수될 위험도 있어 정책에 맞게 진행하려고 한 것”이라며 “공개채용이 공정하게 이뤄졌다는 증거로 면접 채점표 등도 재판부에 제출했다”고 맞섰다.



소송을 제기한 협회장들과 같은 자리에서 지도부의 전횡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한국수어통역사협회와 한국농아인스포츠연맹은 지난 9월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의견서를 보내 ‘농아인협회가 중앙수어통역센터를 운영하며 일부 통역사를 배제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간 숨죽였던 농인들의 폭언·갑질 피해 폭로도 이어졌다. 협회는 지난 10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상처를 입은 당사자와 구성원, 한국농아인협회를 신뢰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사과의 뜻을 밝힌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지회장들과 협회가 다투는 소송의 향방은 알기 어렵다. 지난 22일 열린 두번째 재판에서 판사는 “일반적으로 인사를 할 때는 공평타당한 것이 공개채용”이라고 했다. ㄱ씨는 “어머니가 소송을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용기를 내야 했던 일”이라며, 법원이 소송의 배경이 된 농아인협회의 실상을 이해해주길 바랐다. 다음 재판은 오는 12월17일에 열린다.



조해영 기자 hy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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