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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톡톡] 미국이 막으면 중국은 만든다… 화웨이發 ‘반도체 설계 주권’ 신호탄

조선비즈 최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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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톡톡] 미국이 막으면 중국은 만든다… 화웨이發 ‘반도체 설계 주권’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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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챗 GPT 달리 4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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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반도체 기술의 목줄을 죄자, 중국이 자체 ‘설계 두뇌’를 확보하며 정면 돌파에 나섰습니다. 화웨이의 핵심 파트너인 사이캐리어의 자회사, 치윈팡이 반도체 설계의 심장부인 EDA(전자설계자동화) 소프트웨어를 자체 개발해 공개했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 EDA는 칩의 회로를 설계하고 검증하는 필수 도구로, 사실상 미국 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해 온 분야입니다. 중국의 이번 발표는 미국의 기술 패권에 맞서 ‘반도체 설계 주권’을 확보하려는 본격적인 신호탄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EDA는 반도체 산업의 근간이 되는 핵심 기술입니다. 이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복잡한 반도체 개발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 기술은 최첨단 인공지능(AI) 칩 내부의 미세 회로를 설계하는 것부터, 완성된 칩들을 인쇄회로기판(PCB) 위에 배치하고 연결하는 시스템 설계까지 모든 과정을 아우릅니다. 이 때문에 EDA 기술력은 한 국가의 반도체 설계 역량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케이던스, 시놉시스, 지멘스 3개 기업이 전 세계 EDA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해 왔습니다. 중국으로서는 장비나 소재를 국산화해도, 설계 소프트웨어가 막히면 결국 반도체 개발이 중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겁니다.

◇ 중국, 자체 EDA 기술 공개… “2만명 넘게 사용 중”

치원팡이 공개한 EDA는 이 치명적인 약점을 돌파하려는 반격 카드입니다. 치원팡은 지난 15일부터 사흘간 중국 선전에서 열리고 있는 반도체 엑스포에서 회로도 설계용과 인쇄회로기판(PCB) 설계용 EDA 2종을 선보였습니다. 회사 측은 “기존 글로벌 소프트웨어 대비 성능은 30% 높고 개발 기간은 최대 40% 단축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인 기술 사양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치원팡은 “이미 2만명 이상의 엔지니어가 사용 중”이라며 상용화 수준이라는 걸 강조했습니다.

공개 시점도 의미심장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초 또다시 중국에 핵심 소프트웨어 수출을 통제할 수 있다고 경고한 직후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불과 석 달 전, 미국의 갑작스러운 EDA 수출 통제와 해제 조치로 중국 반도체 업계는 큰 혼란에 빠졌었습니다. 소프트웨어 제재 카드를 다시 꺼내 들자, 중국은 ‘그럼 우리도 만들겠다’는 식으로 맞불을 놓은 겁니다. 업계에서는 “미국이 막으려던 EDA 기술이 제재 때문에 오히려 더 빨리 나왔다”는 평가까지 나옵니다.

◇ 화웨이 반도체 생태계, 칩 설계·장비·생산 자립 가속

AI 반도체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EDA 패권 경쟁은 갈수록 격화할 전망입니다. 과거에는 하나의 칩을 평면적으로 설계했다면, 이제는 여러 칩을 아파트처럼 수직으로 쌓고(3D) 빛(光)으로 연결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을 끌어냅니다. 이처럼 복잡한 구조에선 설계 단계의 정교한 시뮬레이션 없이는 성공적인 칩 개발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미국이 EDA를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닌, 국가 안보와 직결된 ‘핵심 통제 기술’로 지정하며 중국의 접근을 막으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 EDA 발표는 화웨이가 2019년 미국 제재 이후 추진해 온 공급망 자립화, 이른바 ‘내재화 로드맵’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화웨이는 이미 2023년 14나노 이상 공정용 EDA 툴을 자국 기업과 공동 개발했다고 발표한 데 이어, AI 칩과 서버용 칩, 첨단 패키징 등으로 자립 영역을 꾸준히 넓혀왔습니다. 사이캐리어와 같은 파트너사들은 장비부터 소프트웨어까지 각 분야에서 화웨이의 이런 전략을 현실로 만드는 핵심 축입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화웨이가 설계, 장비, 생산 생태계를 모두 자국에서 돌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있다”며 “중국의 EDA 기술은 아직 첨단 공정에 이르지 못했고 미국과의 기술 격차가 크지만, 그동안 가장 취약했던 설계 부분의 자립 기반을 마련한 건 중요한 진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외부의 압박이 역설적으로 중국의 기술 자립 총력전을 끌어내고 있다는 평가가 잇따르는 가운데, 중국의 이런 시도가 성공 여부와 별개로, 세계 기술 시장의 판도를 이미 흔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최지희 기자(h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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