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종연횡 요동치는 일본
지난 10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자민당 총재가 도쿄 자민당 당사에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와 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이날 공명당이 자민당과 26년간 이어온 연립을 끝내기로 하면서, 일본 정치는 차기 총리가 누가 될지 알 수 없는 대혼란에 빠졌다./EPA 연합뉴스 |
일본 집권 자민당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재 선출, 자민당과 공명당의 ‘26년 연립’ 붕괴가 이어지면서 일본 정치가 대혼란을 맞고 있다. 자민당 총재가 곧 총리가 되는 공식이 깨질 수도 있는 상황이 초래되자, 일본 언론들조차 “어떤 예측도 할 수 없다”며 당황한 모습이다. 정권 유지에 급급해진 자민당의 구애 앞에서, 중의원(하원) 20~40석을 가진 중소 정당들이 콧대를 높이는 형국이다.
◇자민당, 다른 야당과 연립 추진
자민당은 오는 14일 의원총회를 열고 현 상황의 타개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자민당 총재이면서도 일본 총리를 못 할 처지에 놓인 다카이치는 일본유신회, 국민민주당 등 어느 쪽이든 손을 잡아, 연립을 이탈한 공명당의 자리를 메꾸겠다는 입장이다. 중의원 의석수 35석인 일본유신회와 27석인 국민민주당 둘 중 한 곳만 합류해도 다카이치의 총리 입성은 거의 확정이지만, 두 당은 주판알을 튕기며 확답을 하지 않고 있다. 국민민주당은 “공명당이 빠진 상황에서 연립에 껴봐야 이득이 없다”는 입장이며, 일본유신회는 “정식 요청이 오면 협상 자리에는 앉는 게 예의”라는 정도다.
2년 전만 해도 자민당은 공명당과 연립하면 야당 협조 없이 어떤 법률도 통과할 수 있는 ‘절대 안정 다수’(261석 이상)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2023년 초 자민당 각 파벌이 정치 행사 때 받은 현금을 장부에 기재하지 않는, 이른바 ‘정치자금 스캔들’이 불거졌다. 국민의 비판 여론에도 ‘1강(强) 시대’에 취한 자민당은 정치자금 규제에 반대하다 작년 10월과 올 7월 중의원·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연속 참패해 단독 과반을 잃었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은 다카이치에게 마지막으로 정치자금 규제안을 제안했지만 “3일만 더 논의할 시간을 달라”는 답변을 듣곤, 연립 이탈을 결정했다.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선거 승패로만 이합집산한 일본 정당의 취약성도 드러났다. 애초에 군비 확충이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공명당은 자민당과 같은 정치 노선이라고 보기 어렵다. ‘선거공학적 동맹’에 불과했다는 의미다. 공명당의 지지 기반 창가학회는 선거 때 자민당 각 후보에게 1만~3만 표를 몰아준 대신, 자민당은 일부 소선거구에서 후보를 안 내고 공명당 후보를 밀었다. 이런 방식으로 자민당과 공명당은 각각 30석, 10석 안팎의 추가 의석을 챙겨왔다는게 일본 정치권의 추정이다.
국민민주당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 |
일본 최대 야당인 입헌민주당은 총리 지명 선거에서 보수 성향의 국민민주당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를 야당 단일 후보로 내세워, 정권을 교체하자는 입장이다. 148석의 제1야당이 27석 소수당에 총리 자리를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입헌민주당, 일본유신회, 국민민주당 등 야당 3당은 합치면 210석으로 자민당보다 많다. 연립 붕괴 전에는 자민당·공명당 연립(220석)보다 적어, 불가능한 그림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입헌민주당이 5분의 1도 안 되는 의석수를 가진 국민민주당 대표를 미는 건 ‘정책 대안도 없는, 이상론의 정당’이란 비판 여론 탓이다. 입헌민주당의 전신인 민주당은 2009~2012년 집권 시절, 확실한 지향점 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다 무너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입헌민주당 대표인 노다 요시히코는 당시 민주당 출신의 마지막 총리였다. 지난달 니혼TV의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입헌민주당(5%)은 국민민주당(9%)보다 낮았다.
입헌민주당의 총리 제안에 다마키 대표는 진정성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다마키 대표는 소셜미디어 X에 “내각총리대신을 맡을 각오가 있다”면서도 “정권을 함께할 정당에는 기본 정책의 일치를 요구하고 있다”고 썼다. 보수 성향인 일본유신회는 같은 이념이라 문제가 없지만, 진보 계열인 입헌민주당엔 ‘정책 일치’라는 단일화 조건을 내건 것이다. 국민민주당은 방위비 증강이나 원전 가동에 찬성하지만 입헌민주당은 반대 입장이다. 노다 입헌민주당 대표는 “‘노리시로(종이를 붙일 때 풀칠을 위한 여백)’를 갖고 협의하자”고 답했다.
◇APEC에 누가 오나
차기 총리를 지명하기 위한 임시국회는 오는 20일이나 21일쯤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예상보다 늦어진 일정이지만, 일각에선 합종연횡에 필요한 시간을 벌려고 임시국회를 더 늦출 수도 있다는 말도 나온다. 문제는 총리가 참석해야 하는 외교 일정이 이달 하순 줄줄이 예정돼 있는데, 누가 일본의 ‘얼굴’로 나설지 아직까지 불투명하다는 사실이다. 오는 26일부터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아세안(ASEAN) 정상 회의가 열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7~29일 일본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 31일부터는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회의가 열린다.
만약 총리 선출이 늦어진다면 퇴임이 확정된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이 무대들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 다카이치가 자민당 총재에 선출된 직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소셜미디어에 ‘다카이치 총리 선출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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