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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View] 日총리 예정된 다카이치, 야스쿠니 참배 보류 검토

조선일보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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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View] 日총리 예정된 다카이치, 야스쿠니 참배 보류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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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총재에 ‘여자 아베’ 당선
한미 자극 우려 일단 유화 행보
일본 차기 총리를 예약한 다카이치 사나에(64) 자민당 신임 총재가 오는 17~19일 야스쿠니 신사에서 열릴 추계 예대제 때 참배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이 8일 보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戰犯)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정치적 트레이드마크’로 삼아온 그간의 강경 우익 태도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달 중순 임시국회에서 일본 최초 여성 총리가 될 다카이치가 한국 및 주변국과 맺은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다만 야스쿠니라는 ‘첫 고비’를 넘기더라도 다카이치 시대의 한일 관계는 현 이시바 시게루 총리 때보다 훨씬 험난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미국 우선주의’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이어 ‘여자 아베’ 다카이치의 등장으로, 한미 동맹 및 한·미·일 협력을 근간으로 하는 한국 외교 안보도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앞서 다카이치는 지난 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줄곧 여론조사 1위를 달리던 고이미즈 신지로 농림상을 제치고 신임 총재로 선출됐다. 당 소속 국회의원의 지지에서 열세였던 다카이치는 1차 투표에서 42.1%에 이르는 압도적 당원·당우(자민당을 후원하는 정치 단체 회원)의 지지를 받아 1위를 차지했고, 고이즈미와 벌인 결선투표에서 승리했다. 자민당은 현재 연립 여당인 공명당과 합쳐도 국회 과반수에 미달하지만, 야당도 분열해 있기 때문에 이변이 없는 한 다카이치가 총리로 선출될 전망이다.

◇일단 몸 낮추는 다카이치… 한일 관계 흔들 ‘불씨’는 여전히 잠복

다카이치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대표적 우파 정치인이다. 일본군위안부, 징용 노동자 문제 등 한일 과거사 문제에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여왔으며,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해 왔다. 또한 매년 춘·추계 예대제와 패전일에 빠지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왔다. 다카이치는 지난달 선거 토론회에서도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행사에 내각 장관이 당당히 참석해야 한다”며 “(한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3년 전 한 심포지엄에서는 “(우리가) 야스쿠니 참배를 중간에 그만두는 등 어정쩡하게 하니까 상대가 기어오르는 것”이라고도 했다.

당장 야스쿠니 참배가 다카이치 시대 한일 관계의 첫 시험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직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2013년 아베 전 총리가 마지막이었는데, 당시 한국은 물론 미국도 비판 성명을 냈다. 다카이치가 총재 당선 뒤 기자회견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적시에 적절히 판단할 것”이라며 종전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데 이어, 이날 ‘참배 유보’ 기류까지 흘러나온 것은 그만큼 현직 총리 신분으로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일의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신임 총재의 야스쿠니 참배는 (한국·중국 등 이웃 국가를 자극해) 파장이 크다는 이유로 자민당 내부 일부와 연립 정당 공명당이 반대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미국 측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정치인 다카이치’와 ‘총리 다카이치’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다.

다카이치 사나에(오른쪽) 신임 일본 자민당 총재가 지난 4일 선출 직후 이시바 시게루(왼쪽에서 둘째) 총리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신화 연합뉴스

다카이치 사나에(오른쪽) 신임 일본 자민당 총재가 지난 4일 선출 직후 이시바 시게루(왼쪽에서 둘째) 총리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신화 연합뉴스


일각에서는 다카이치가 대외 강경 노선을 이어가면서도 현재의 한일 협력 관계를 쉽게 허물지는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중국의 군사력 확장, 북한과 러시아 군사 협력,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예측 불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동아시아에서 한국은 일본에 최우선 협력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또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한국 관계에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카이치는 총재 선거 당시 토론회에서 “한일 관계를 심화시켜 나가겠다. 안보 환경을 고려해 한미일 3국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한일 관계 악화의 불씨는 잠시 잠복하더라도 언제든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이 많다. 당내 기반이 약한 다카이치가 자기를 밀어준 강경파의 기대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한일 관계의 뇌관을 건드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친한(親韓) 색채가 강했던 이시바 시게루 현 내각과 달리 다카이치 내각에 강경 우파 이름이 벌써부터 거론되는 것도 우려를 더하는 대목이다.


우리 정부는 다카이치 신임 총재 선출에 대해 “새 내각과도 긴밀히 소통하며 한일 관계의 긍정적 흐름을 이어 나가기 위해 계속 협력해 나갈 것”이라는 원론적 방침을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한일 양국은 격변하는 지정학적 환경과 무역 질서 속에서 유사한 입장을 가진 이웃이자 글로벌 협력 파트너”라며 “미래 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카이치는 대미 관계에서는 아베 노선을 계승해 ‘트럼프 밀착’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라는 게 일본 정치권의 대체적 시각이다. 아베와 친분이 두터웠던 트럼프는 6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일본이 첫 여성 총리(총재를 오해한 발언)를 막 선출했다”며 “큰 지혜와 강인함을 지닌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썼다.

다카이치는 이달 말 일본을 방문하는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이어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해 국제 무대에 공식 데뷔함과 동시에 이재명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 만에 이시바 총리와 3차례 만났는데, 다카이치 시대에도 한일 ‘셔틀 외교’가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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