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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만 봐도 무서웠지만…” 타국에서 선수들에게 김치찌개 끓여준 박종환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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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만 봐도 무서웠지만…” 타국에서 선수들에게 김치찌개 끓여준 박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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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23년 10월 7일 87세
대구 박종환 감독

대구 박종환 감독

1983년 6월 14일 자 조선일보는 전체 12개 면 중 4개 면을 축구 기사에 할애했다. 1면은 ‘한국 축구 세계 4강 오르다’란 메인 제목에 ‘16일 브라질과 준결’ 부제를 달았다.

“한국 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세계 4강에 도약, 16일 오전 8시(한국 시각) 남미의 강호 브라질과 결승 진출을 놓고 격돌케 됐다. 한국은 12일 오전 8시 몬테레이에서 벌어진 제4회 청소년 축구 대회 준준결승에서 연장전을 포함한 120분간의 사투 끝에 신연호의 선제골과 결승골로 강적 우루과이를 2대1로 물리치고 축구 사상 처음으로 4강에 진입했다.”(1983년 6월 14일 자)

2002년 기사가 아니다. 1983년 청소년 축구 4강 기사. 1983년 6월 14일자 1면.

2002년 기사가 아니다. 1983년 청소년 축구 4강 기사. 1983년 6월 14일자 1면.


8면엔 한국 축구에 대한 외신 반응과 ‘작은 펠레 신연호’, 9면엔 준결승 상대인 브라질 경기 전망으로 ‘번개 작전… 또 한 번 놀래주겠다/ 사기 충천… 선제 공격 승부’, 11면엔 ‘축구에 미친 철의 사나이/ 세계 4강 영웅 길러낸 ‘대부’ 박종환 감독’ 기사가 이어졌다.

축구에 미친 철의 사나이. 1983년 6월 14일자 11면.

축구에 미친 철의 사나이. 1983년 6월 14일자 11면.


한국은 1983년 멕시코 청소년 축구대회 A조 스코틀랜드와 첫 경기에서 0대2로 완패했다. 그러나 2차전인 홈팀 멕시코 경기부터 놀라운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한국은 간결하고 빠른 패스로 경기를 지배하며 멕시코에 2대1로 역전승했다. 신연호가 후반 44분 결승 골을 넣었다.

호주와 3차전에선 전반에 터진 김종건·김종부의 연속 골로 2대1 승리를 거뒀다. 열세가 예상된 8강전 상대 우루과이전에서도 신연호가 2골을 넣으며 2대1로 승리했다. 브라질과 준결승 경기에선 김종부가 전반 선제골을 터뜨렸지만 1대2로 역전패했다. 3-4위전에선 폴란드에 연장 승부 끝에 1대2로 졌다.

청소년 대회였지만 한국이 FIFA(국제축구연맹)가 주관하는 세계 대회에서 4강에 오른 것은 역사상 최고 성적이었다. 당시 한국은 축구의 변방이었다. 1954년 월드컵 첫 출전 이후 30년간 한 번도 세계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한국 축구는 3년 후인 1986년부터 월드컵 대회에 연속 진출하기 시작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게 된다.


2023년 5월 2일자 A29면.

2023년 5월 2일자 A29면.


당시 국내 팬들은 조직적이면서 공격적인 플레이를 보인 ‘박종환 축구’에 열광했다. 외국 언론도 한국 축구 기사를 쏟아냈다.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휘젓는 한국팀을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표현했다. 후일 한국 축구에 ‘붉은 악마(Red Devils)’라는 별명이 붙게 된 계기였다.

이사람 박종환 시리즈 기사. 1983년 6월 22일자.

이사람 박종환 시리즈 기사. 1983년 6월 22일자.


‘4강 신화’를 쓴 청소년 대표팀 감독 박종환(1936~2023)은 일약 국민적 스타가 됐다. 귀국 때는 선수단과 오픈카를 나눠 타고 김포공항~여의도~마포~광화문~남대문에 이르는 카 퍼레이드를 펼쳤다. 조선일보는 선수단 카 퍼레이드 기사를 쓴 6월 22일 자부터 ‘이 사람 박종환’이라는 제목으로 박종환 감독 스토리를 7회에 걸쳐 연재했다.

박종환은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기로 유명했다. 대회 장소인 멕시코가 해발 2000m 고지대라는 점에 착안해 국내에서 선수들에게 면 마스크를 쓰고 400m 트랙을 20바퀴 이상 달리게 했다.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규율에 어긋나는 선수에겐 체벌도 서슴지 않았다. 선수들은 “감독님 눈빛만 봐도 무서웠다”고 했다. 멕시코 4강 주역 신연호는 “호랑이처럼 무섭고 야속했지만, 타국에서 선수들에게 손수 김치찌개를 끓여 먹일 만큼 정 많은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박종환 별세. 2023년 10월 9일자 A18면.

박종환 별세. 2023년 10월 9일자 A18면.


멕시코 4강 이후 박종환은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5번 맡았다. 대표팀 감독으로서는 뚜렷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은 때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성남 FC 감독을 맡았던 2014년 선수 폭행 논란으로 4개월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만년에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요양 병원에서 생활했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하거나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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