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내통 의혹’ 조사
코미 前 국장 기소
코미 前 국장 기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25일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을 기소했다./AP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내통 의혹’을 수사하다 경질된 뒤 트럼프와 대립각을 세워 온 제임스 코미 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이 25일 기소됐다. 트럼프가 지난 20일 코미를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팸 본디 법무 장관에게 기소를 지시한 지 닷새 만이다. ‘정치 보복’ 성격이 짙은 이번 기소를 두고 미국 사회에서는 연방 최고 법 집행 기관의 정치적 독립성을 훼손한 것이란 비판도 나온다.
코미 기소는 트럼프와 코미의 9년 전 악연에서 출발한다. 공화당원 출신인 코미는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2013년 FBI 국장으로 발탁됐고, 2016년 대선 당시 ‘러시아 내통 의혹’을 수사 지휘했다. 러시아 정부가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측 이메일을 해킹해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 캠프가 그 정보를 활용했다는 내용이 골자다. 트럼프는 코미가 자신의 당선을 막으려고 이런 수사를 했다고 비판했고,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17년 5월 코미를 전격 경질했다. 10년 임기의 FBI 국장이 중간에 경질된 것은 1993년 전용기 남용 등 개인 비위 사실이 들통났던 윌리엄 세션스 전 국장을 포함해 두 번째였다.
2019년 이 건을 수사한 특별검사는 “러시아가 개입했지만 트럼프 캠프와 공모했는지는 입증하지 못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2020년 9월 상원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코미는 “수사와 관련된 내용을 부하 직원을 시켜 언론에 보도되도록 허락했느냐”는 질문에 “그런 일이 없다”고 답했다. 연방 검찰은 바로 이 발언을 문제 삼아 5년 만에 허위 진술과 의회 절차 방해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이날 공소장에서 검찰은 “이 발언은 거짓이었다”라고 적시했지만, 혐의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는 밝히지 않았다. 코미의 혐의가 인정되면 최고 징역 5년까지 선고받을 수 있다.
제임스 코미 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이 2017년 6월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눈을 감은 채 선서하고 있다. 그는 2016년 대선에서 러시아가 트럼프의 승리를 위해 개입했는지를 규명하기 위한 수사를 이끌었던 인물로, 트럼프 1기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 해임됐다. 트럼프는 최근 법무부와 검찰에 코미 등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인사들을 기소할 것을 압박해 왔다./AFP 연합뉴스 |
검찰 내에서도 무리한 기소라며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하명(下命) 수사를 거부한 에릭 시버트 버지니아 동부 연방검사장을 해임하고, 자신의 변호인 출신인 린지 할리건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검사장으로 임명했다. 일선 검사들이 기소를 반대하자 할리건이 밀어붙였고, 두 쪽 분량의 공소장에도 할리건의 서명만 들어갔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코미는 기소된 뒤 소셜미디어에 올린 영상 메시지에서 당당하게 재판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두려움은 폭군의 도구’이며 나는 두렵지 않다”면서 “우리는 무릎 꿇고 살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트럼프는 트루스 소셜에 코미를 ‘더러운 경찰’이라고 부르면서 “그는 단순하지만 아주 중대한 거짓말을 했다”고 썼다.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미 최고 권력과 최고 엘리트 수사기관의 관계도 재조명되고 있다. FBI는 조직원 3만4000여 명을 거느리며 연간 예산 10조원 이상을 쓴다. 워싱턴에서 가장 연건평이 큰 건물을 청사로 쓰고 있는 것은 FBI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08년 ‘법무부 수사국’으로 출발한 FBI는 존 에드거 후버가 1924년 국장을 맡아 장기 집권하며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실세 정치인들의 비밀·스캔들을 수집해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며 ‘장막 뒤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1972년 사망할 때까지 48년 동안 FBI를 이끌었는데, 그가 거쳐간 대통령 8명은 모두 후버를 껄끄러워하면서도 ‘감히’ 건들지 못했다.
하지만 FBI의 비대한 권력을 문제 삼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1976년 국장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는 법이 통과됐고, FBI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며 헌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법무부 내부 가이드 라인도 만들어졌다. 대통령보다 긴 임기는 외압에서 자유로운 수사기관의 독립성을 위한 것이다. 실제 FBI 국장은 이런 미국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도 했다. 9·11 테러 이후인 2004년 미 정부는 국가안보국(NSA)이 영장 없이 이메일·전화 통신을 감청하는 프로그램을 연장하려고 했지만, 로버트 뮬러 당시 FBI 국장은 사임 의사를 밝히며 완강히 반대해 무산시켰다. 2011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그런 뮬러의 독립성을 높게 사 의회의 동의를 받고 임기를 2년 연장했다.
하지만 통상 정파에 상관없이 임기가 보장되던 FBI 국장의 권위와 독립성은 트럼프 시대에 들어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는 2017년 8월 자신이 임명한 크리스토퍼 레이 국장을 임기가 2년 반 이상 남아 있던 지난 1월 사실상 갈아치웠다. 이후 트럼프 1기 백악관·국방부 보좌관 출신인 충성파 캐시 파텔을 국장으로 임명했다. 파텔 취임 후 트럼프 수사에 관여했던 고위급들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고됐다. 파텔은 의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과거 트럼프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 의원들에게 ‘역사상 최대의 사기꾼’ ‘정치적 어릿광대’ 등의 막말을 퍼붓기도 했다. 민주당은 “트럼프와 파텔이 FBI를 사유화해 정적(政敵)에 대한 보복의 도구로 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