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부자 국가서 배운다](종합-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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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2% vs 호주 10%…퇴직연금 연 수익률 차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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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멜버른 도심에 있는 퇴직연금 기금 호스트플러스의 LED 전광판 광고(왼쪽)와 케어슈퍼의 광고로 랩핑된 트램/사진=김근희 기자 |
# '5년 연속 수익률 1위.' 호주 국제 멜버른 공항을 나와 고속도로를 달리자 대형 옥외광고가 눈에 띄었다. 호주 퇴직연금 기금 중 한 곳의 운용 성과를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멜버른 도심에 도착하자 또 다른 기금인 케어슈퍼(CareSuper)의 광고로 전체를 감싼 트램(노면전차)이 지나다녔다. 건물 사이에 있는 대형 LED(발광다이오드) 전광판에서는 호스트플러스(Hostplus)라는 기금의 광고가 나왔다.
호주 멜버른과 시드니를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퇴직연금 기금 광고를 볼 수 있다. 호주 퇴직연금인 '슈퍼애뉴에이션'은 고용주가 근로자 급여의 12%를 의무적으로 퇴직연금 전용 계좌에 적립하고, 근로자는 퇴직연금을 운용할 기금과 상품을 선택하는 기금형 시스템이다. 각 기금들은 조금이라도 더 가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이처럼 광고를 한다.
슈퍼애뉴에이션은 1992년 도입된 후 현재까지 운용 규모와 수익률 모두 높은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호주건전성규제당국(APRA)과 컨설팅 기업 머서 오스트레일리아에 따르면 제도 도입 당시 1480억호주달러(약 137조원)였던 퇴직연금 자산은 지난 6월 기준 총 4조3301억호주달러(약 4006조원)로 증가했다. 전 세계 3위 규모다. 최근 5년 평균 연간 수익률은 7.9%다. 최근 1년 수익률은 10.2%에 달한다. 연간 수익률이 2%를 맴돌고 있는 한국 퇴직연금과는 대조된다.
호주 현지 자본시장 전문가들은 슈퍼애뉴에이션의 성공이 단순히 기금형 구조 때문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그보다는 △의무화 △높은 위험자산 투자 비중 △정부의 제도 △기금 간의 경쟁을 성공 비결로 꼽는다. 슈퍼애뉴에이션은 18세 미만 비정규 근로자, 65세 이상 근로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의무 가입해야 한다. 퇴직연금 계좌에 납입하도록 한 법정 기여율은 제도 도입 초기 3%에 불과했으나 현재 12%로 높아졌다. 또 슈퍼애뉴에이션 적립금은 65세 전까지 중도 인출이 극히 제한적이다. 이에 호주 퇴직연금 자산 규모는 빠르게 증가했다.
호주 슈퍼애뉴에이션 자산 추이/그래픽=윤선정 |
슈퍼애뉴에이션 펀드는 위험·수익 성향에 따라 보수형(Conservative), 균형형(Balanced), 성장형(Growth) 등으로 나뉘는데 투자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균형형의 위험자산 비중은 70%다. 성장형은 이보다 위험자산 비중이 더 높다. 덕분에 호주 퇴직연금의 주식 투자 비중은 슈퍼애뉴에이션 도입 전 40%에서 현재 72%로 늘었다.
알렉스 자이카 글로벌X 오스트레일리아 CEO(최고경영자)는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했을 때 장기적으로는 채권, 예금보다 주식과 같은 성장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유리하다"며 "슈퍼애뉴에이션이 다른 국가 퇴직연금보다 수익률이 높은 것은 주식 투자 비중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호주 정부도 기금이 수익률을 높일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다. 2013년 호주 정부는 근로자가 퇴직연금 운용 상품을 정하지 않는 경우 자동으로 기금에서 만든 '마이슈퍼(My Super)' 펀드에 가입하도록 했다. 연금 적립금이 계좌에 방치되지 않고, 어떻게든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킴 보워터 프론티어 어드바이저스 컨설팅 디렉터는 "마이슈퍼는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인 만큼 장기투자에 적합한 투자 전략을 적용한 상품"이라며 "그 결과 장기간에 걸쳐 높은 수익률을 낸다"고 말했다. 장기 수익률을 높이는 게 목표인 만큼 기본적으로 마이 슈퍼 펀드는 주식 투자 비중이 높고, 한국 디폴트 옵션처럼 원리금 보장 상품이 없다.
호주 시드니 하이드 공원에서 노인들이 체스를 즐기고 있다./사진=김근희 기자 |
호주 정부는 2021년 성과가 부진한 기금을 퇴출하는 시스템인 '유어 퓨처, 유어 슈퍼(Your Future, Your Super·YFYS)'라는 제도를 시행했다. 정부가 매년 진행하는 성과 시험에서 8년 동안의 순투자수익률이 벤치마크보다 0.5%포인트 이상 낮다는 판정을 받은 기금은 이를 반드시 가입자에게 통지해야 한다. 시험에서 2년 연속 탈락하면 신규 가입자를 받을 수 없고, 다른 기금과 합병해야 한다. 결국 기금들은 살아남기 위해 수익률을 높이는데 힘쓰게 됐고, 그만큼 또 위험자산 투자 비중이 늘어났다.
팀 젠킨스 머서 오스트레일리아 파트너 겸 슈퍼애뉴에이션 컨설팅 리더는 "2004년 1511개였던 기금이 지난 6월 기준 78개로 감소했다"며 "앞으로도 기금 간 합병은 계속되고, 20년 뒤에는 약 25개 기금만 남고, 전체 자산은 14조호주달러(1경2954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슈퍼애뉴에이션의 성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젠킨스 파트너는 "2035년이 되면 많은 사람이 은퇴기에 들어서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슈퍼애뉴에이션 적립금 보다 연금 지급액이 더 많아지는 상황이 오지만, 투자 수익률 덕분에 슈퍼애뉴에이션의 자산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며 "현재 호주 GDP(국내총생산)의 약 140%에 달하는 슈퍼애뉴에이션 자금이 장기적으로 170%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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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수익률 0%대 韓퇴직연금…"'투자'도, '교육'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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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서 CFA 글로벌 연금지수 호주와 한국 결과/그래픽=김지영 |
"한국은 호주보다 퇴직연금을 적립해 투자하고, 장기적으로 자산을 꾸준히 불려 나가는 구조가 미흡합니다."
팀 젠킨스 '머서 오스트레일리아' 파트너 겸 슈퍼애뉴에이션 컨설팅 리더는 호주 시드니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간 기자가 '한국의 퇴직연금이 발전하기 위해 호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묻자 이같이 답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머서는 매년 전 세계 국가들의 연금 시스템(공적연금·퇴직연금·사적연금) 등을 평가하고, 머서 CFA 인스티튜트 글로벌 연금 지수(MCGPI)를 발표한다. 젠킨스 파트너는 MCGPI의 총괄 저자이자 호주 퇴직연금 시스템 '슈퍼애뉴에이션' 펀드 컨설팅팀을 지휘한다.
지난해 기준 MCGPI에 따르면 한국은 종합지수 52.2점(100점 만점)으로 48개국 중 41위를 기록했다. GDP(국내총생산) 규모가 더 작은 칠레(9위), 말레이시아(32위), 보츠와나(34위) 보다 순위가 낮다. 한국은 몇 년째 C등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호주는 종합 지수 76.7로 전 세계 6위에 올랐다.
젠킨스 파트너는 "전 세계 국가들의 연금 시스템을 놓고 비교해보면 국가 주도형이냐 민간주도형이냐, 기금형이냐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단지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퇴직연금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연금 시스템 구조를 따지기보다는 퇴직연금 적립 기여 수준을 높이고, 투자를 통해 자산을 늘리는 등 실제로 자산 규모를 불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호주 현지에서 만난 금융투자 업계 전문가들은 한국 퇴직연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식 등 적극적인 위험자산 투자를 통해 수익률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말 기준 최근 5년간 한국 퇴직연금 가입자의 연평균 수익률은 2.86%로, 같은 기간 소비자 물가 상승률(2.8%)을 고려하면, 실질 수익률은 0%다. 반면 지난 6월 기준 호주 슈퍼애뉴에이션 5년 평균 연간 수익률은 7.9%다.
투자자 교육도 중요한 요소다. 호주는 슈퍼애뉴에이션 기금, 정부 등 여러 기관에서 주도적으로 투자자 교육을 하고 있다. 킴 보워터 프론티어 어드바이저스 컨설팅 디렉터는 "기금들은 온라인 계산기 같은 도구를 제공해, 가입자들에게 현금성 자산에 머무르면 주식에 투자하는 균형형 펀드(Balanced)에 투자했을 때 비해 장기 수익률이 크게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알렉스 자이카 글로벌 X 오스트레일리아 CEO(최고경영자)도 "투자자들이 장기 투자 시 왜 주식을 사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교육해야 한다"며 "물가상승률이 돈의 가치를 잠식한다는 점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주식 투자를 하려 할 것"이라고 했다.
퇴직연금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것 역시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호주건전성규제당국(APRA)은 슈퍼애뉴에이션 전체 운용 성과 등을 주기적으로 발표한다. 가입자는 이를 통해 각 펀드의 순수익률, 수수료 등을 비교할 수 있다. 또 엄격한 규제를 통해 성과가 낮은 기금은 퇴출한다.
젠킨스 파트너는 "한국은 퇴직연금 연간 가입자 명세서 제공, 위험관리 등이 부족하다"며 "결국 이는 퇴직연금 제도의 신뢰성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시드니·멜버른=김근희 기자 keun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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