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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혁신으로 새 시대를 연 민주화 대통령 김영삼

조선일보 이각범 전 대통령실 정책기획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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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혁신으로 새 시대를 연 민주화 대통령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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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10주기 세미나 발제문
이각범 전 대통령실 정책기획수석

이각범 전 대통령실 정책기획수석

김영삼 대통령은 개혁 대통령이다. 우리 사회에 구조적으로 착근한 많은 문제를 혁파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나라를 일신하였다. ‘변화와 개혁’ 시대 정신에 충실하여 임기 내내 개혁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생활하는 제도 중의 상당수는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우리나라의 일상으로 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기 훨씬 전에 이미 우리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구조적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였다. 이 문제군(群)들을 김 대통령은 한국병이라고 명명하고 비생산적 정치, 고비용·저효율화되는 경제,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 갈등의 파고를 넘어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풍요한 신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매진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병 중에서도 가장 큰 병이 부정부패”라고 하였다. “부정부패의 척결 없이는 국가 발전도 없다”는 대명제 아래 사회 곳곳에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부정부패 척결에 정면 도전하였다.

당시 세상에는 부정부패가 인간 사회의 필요악인 것처럼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다. 심지어 일부 학회나 지식인 사회까지도 부정부패가 경제성장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는 교언(巧言)을 서슴지 않았다. 문민정부 이전의 역대 정권에서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우지 않은 정권이 없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정권에서 부정부패 문제가 나오면 미온적이고 형식적 대처에 그쳤다.

김영삼 대통령은 달랐다.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이유, 대통령이 되고자 한 이유 자체가 ‘깨끗하고 정직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이 깨끗하고 정부가 정직해야 우리나라를 자유롭고 역동성 있는 민주사회로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설정한 국정 제1목표인 부정부패 척결을 위하여 취임 첫날부터 검찰은 사정(司正)에 착수하였고, 감사원은 회계감사와 직무감찰에 성역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취임 이틀 후 첫 국무회의 날 대통령은 솔선수범하여 고위공직자 재산 등록을 마쳤다. 이후 정무직공무원과 선출직공무원의 재산 공개가 이루어졌고, 부패방지위원회에 선행하여 감사원에 부정방지대책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신한국 건설을 위하여 김영삼 대통령은 정상화, 투명화, 합리화의 세 가지 전략을 구사하였다.

◎정상화를 통해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군의 정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투명화를 통해 부정부패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이루어 냈다.


◎합리화를 통해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경제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은 제도 개혁, 관행과 과정의 개혁, 의식 개혁에 이르는 총체적 개혁이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의 제도 개혁은 누구도 좋은 제도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만들려고 하지 않은 제도를 만든 과단성 있는 개혁이었다.

금융실명제는 전격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취임 전 장기 구상 끝에 내린 결심의 결과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동안 정치인, 경제계 인사, 언론인, 고위 공무원, 일부 학자, 자영업자 등 각계 인사들로부터 금융실명제가 우리 경제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파장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취임 직후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비밀리에 구성된 금융실명제시행기획단에서 관련 전문가와 공무원들은 금융실명제안을 성안하였다. 동시에 금융실명제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보완 정책을 금융실명제 출현 전에 실시하였다.


금융실명제 실시 여부가 공론화되기 시작하면 국내외 시장의 혼란이 극심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긴급 명령권에 의해 금융실명제 실시를 명령하였다. 큰 부작용 없이 금융실명제는 지하 경제의 축소와 부패 감소에 뚜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누대에 걸친 국민적 숙원 사업인 개혁 작업을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그는 전략과 실행력과 정치적 능력을 두루 겸비하였다. 강력한 개혁 의지를 지녔고, 국가적으로 꼭 해야 하는 개혁 과제가 있으면 개인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실행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가졌던 깨끗한 정치의 꿈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꿈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처럼 정치 9단의 정치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권력 게임보다 국가 혁신에 매진하고, 국격을 높이는 과제에 집중하는 지도자를 우리는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김영삼 대통령은 과학기술과 디지털 전환에 대하여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던 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예민한 국가 감수성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그는 집권하고 있는 바로 그 시기가 세계의 문명사적 변환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큰 변화에 조금이라도 지체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취임 직후 부정부패 척결,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와 같은 개혁의 태풍이 몰아쳐서 수많은 고위직 인사가 옷을 벗고, 또 수많은 별이 떨어지고, 지하 경제와 음성 거래가 대명천지에 노출되는 와중에 그는 조용히 초고속 정보 통신망(인터넷망) 구축을 서두르라고 지시하면서 관련 예산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정보통신부를 출범시켰다.

또한 금융실명제를 보완하는 부동산실명제를 실시하고, 의약분업 체계 개편의 논쟁이 뜨거웠던 시기에 경부고속전철(KTX)의 시스템과 차량 제작 협력사를 선정하고 본격적 건설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인천국제공항을 첨단 건축공법과 정보통신 시스템을 갖춘 공항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김영삼 정부에서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 KTX 건설, 인천국제공항 신설과 같은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국가적 차원의 장기 전략과 비전 제시, 기술 발전과 민간 참여를 적극 활용한 효율적 추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영삼 대통령의 청렴함으로 리베이트-제로 건설이 가능해져서 부실 시공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 1단계는 한국병의 극복과 신한국 건설 기간이었다. 2단계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대한민국의 도전 시기였다. 부정부패 척결을 국정의 제1목표로 설정하였던 1단계를 지나 공간적으로는 세계로, 시간적으로는 새로운 시대로 확장된 시공 체계에서 국정의 제일 목표를 세계화·정보화로 다시 설정한 2단계를 거치며 세계 속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세계 일류를 지향하는 김영삼 대통령의 본격적 도전이 계속된 것이다.

◇논평 : 특정 지역 독점 체제 와해와 여야 정권 교체로 / 문성우 전 법무부 차관

김영삼 대통령이 77년 헌정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는 민주화 투쟁으로써 쌓아 올린 국민적 신뢰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불가역적으로 확실하게 이루었다는 점이다. 박정희 정부 이후 30여 년간 권력과 부가 특정 지역 중심으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깨뜨리지 않고서는 실질적인 민주화인 정권 교체가 불가능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는 문민정부로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고, 군부 사조직으로서 권력 핵심인 하나회를 대통령 취임 즉시 해체한다. 이어서 공직자 재산 신고, 금융실명제 등을 실시하고 급기야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며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특정 지역 중심의 독점 체제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이는 김영삼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그들과 같은 당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나 재야 인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같은 당 소속 대통령 후보인 이회창 후보가 대구 및 경북 세력을 등에 업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 전 의원이 이인제 후보를 돕는 것을 묵인하고,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터진 검찰의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를 중단시킴으로써 DJP(김대중, 김종필) 연합의 집권이 가능하게 한다.

여야 정권 교체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이유는 소외된 계층의 정치 참여로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러한 특정 세력 독점 분쇄는 여야 정권 교체로 귀결되었고, 우리 나라는 사회 통합을 이루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제까지는 “너희 나라이니 너희들끼리 잘해보라”고 하면서 냉소주의에 빠져 있던 다수의 소외 계층들이 이제는 “우리 나라”라고 하면서 국가 발전에 적극 동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다이나믹 코리아”가 된 것이다. 외환 위기 때 전국적인 금 모으기 운동,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때 전 국민의 하나가 된 “대한민국” 연호, 태안반도의 해양 기름 유출 때 100만명 이상이 일시에 몰려가 기름띠를 제거한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일들은 모두 이러한 국민 통합의 산물이다.

YS가 없었으면 DJP 연합도, 금융실명제도 없었으며, 러시아와 같은 과두 독재 체제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김영삼은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기반으로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가게 하였고, 이것이 그가 77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산업화 대통령 박정희와 더불어 민주화 대통령 김영삼으로 추앙받는 이유이다.

[이각범 전 대통령실 정책기획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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