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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87] 무량리

조선일보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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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87] 무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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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리

일러스트=김성규

일러스트=김성규


무량리행 버스는 하루 한차례뿐이다.

이정표 앞에 멍하니 서서

무량리, 하고 입속으로 부르며

무량한 한 사람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이

길 잃은 마음이 먼저 앞서가며 닿는다.

다 닳은 돌쩌귀 매단 문설주가 쨍쨍한 햇볕에


몸 말리며 서 있는 곳

서슬 푸르렀던 지난 시간들이 자질자질 잦아들고

길가엔 벌써 머리 희끗해진 풀들이 나와 있다.


강심 깊숙이 걸어들어간 투망꾼 몇이서

왁자하게 그물을 던졌다 건져 올리는 소리

이리저리 튀는 물고기들을 잡았다 놓아주는 소리


길에서 산짐승을 만나도 피하지 않는 곳

무량리를 주머니 깊숙이 접어 넣고

부력을 잃고 뜬 물고기처럼 무심히

시간을 강에 빠뜨리고 느릿느릿 걷고 걷는다.

-노향림(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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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이라는 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뜻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근원적인 것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그 그리움은 “한 사람”을 향한 것이요, 옛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을 향한 것이요, 한가하고 잠잠하고 화평한 세계를 향한 것이다.

시인은 무량리에서 낡은 집을 보고, 억세고 왕성한 초록빛 성장을 끝낸 풀을 보고, 강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을 본다. 특히 강에서 투망하는 사람은 물고기를 잡는 데에 의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 바깥으로 나온 물고기의 펄펄 뛰는 생명력을 보는 일에 더 뜻이 있는 것만 같다.

무량리에서 생명은 욕심이 지나치지 않고, 억지를 쓰지 않고, 서로를 꺼리지 않고, 은은한 평화 속에서 살아간다. 시인은 그곳에 당도해 “길 잃은 마음”을 풀어놓는다. 마치 투망에 걸려온, 헐떡이는 물고기를 푸른 강으로 되돌려보내듯이. 다그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던 마음은 무량리에 이르러 제 속도를 되찾고, 무심한 상태로 회복된다. 마음속에 무량리 같은 마을이 한 곳쯤 자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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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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