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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윤석열 목도할 수도 있는 토양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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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윤석열 목도할 수도 있는 토양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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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후문에 설치되어있었던 서부지법 표시판과 부서진 건물 외벽. 정용일 선임기자

지난 1월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후문에 설치되어있었던 서부지법 표시판과 부서진 건물 외벽. 정용일 선임기자




류이근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뉴트 깅그리치가 최근 통일교 소유 신문인 미국 워싱턴타임스에 글을 하나 올렸다. 미 의회 하원의장까지 지낸 그는 한국에서 종교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면서 한-미 관계가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고 경고장을 날렸다. 윤석열 부부의 부정 청탁 의혹 등을 밝히는 과정에서 통일교를 향해 이뤄진 수사를 종교 탄압으로 몰아붙였다. 친위 쿠데타로 한국 민주주의가 진짜 위기에 빠졌을 때 정작 침묵했던 그의 으름장은 생각해볼수록 불쾌하고 섬뜩하다.



그의 글은 국내 보수 언론과 유튜버를 거쳐 확대재생산되면서 탄핵 반대를 기치로 뭉쳤던 극단주의 세력에게 응원 메시지로 작용했다. 안 그래도 보수 세력은 계엄 실패 뒤 미국 쪽 힘을 빌려 반전을 꾀하기 위해 워싱턴을 향해 계속 구애 작전을 펴왔다.



한국 사회 분열에도 일조한 깅그리치는 1990년대부터 미국에 정치 양극화 씨를 뿌리고 성과를 거둔 주역이기도 하다. 민주당으로부터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되찾아왔지만 타협을 싫어했던 그의 말과 행동은 거칠었다. 그는 상대편을 향해 ‘반역’, ‘반애국적’이란 말을 부적처럼 썼다.



깅그리치 등장 이후 미국 정치는 빠르게 양극화로 치달았다. 1981년 접점이 많아 하나의 큰 타원형처럼 보였던 미 하원의원들 간 ‘거리 지도’(클리오 앤드리스)가 1991년 중간이 텅 빈 무인 지대가 되면서 두개의 원으로 분리되었다. 2001년 이후에는 두 원의 거리가 더 멀어지기 시작해 이제 서로 다른 은하계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소득계층 간 거리가 더 멀어질수록, 즉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정치적 양극의 거리 또한 더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미 하원의 정치 양극화 지수와 소득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1970년대 말부터 비슷한 궤도(놀런 매카티)를 그려왔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미국 소득 불평등은 1980년대부터 빠르게 악화되었는데 그 토양에서 정치 양극화 또한 급속도로 진행됐다. 반대 정당에 ‘아주 적대적’이라고 응답하는 미국인 비율도 지난 30년 동안 3배 가까이 늘어나, 지금은 60%(퓨리서치센터) 안팎에 이른다. 결국 민주주의 지반의 심각한 침식으로 나타났다.



2021년 1월6일 미 의회에서 일어난 폭동이 대표적이다. 정치 양극화 덕에 2016년 집권에 성공한 트럼프는 4년 뒤 부정선거로 승리를 도둑맞았다면서 양극화를 성채 삼아 폭동을 부추겼다. 마이클 샌델은 트럼프 당선이 수십년간 심화한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판결이라고 봤다. 스티븐 레비츠키는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란 책에서 소득 정체와 불평등 심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급진적 우파 포퓰리즘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양극화가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란 규범을 약화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폭력으로 의회를 점거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과연 누군지 모자이크를 맞춰보면 미국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과 극단주의의 연결 고리를 찾게 된다. 존 콤로스 뮌헨대 명예교수가 폭동 참여로 기소된 933명을 분석한 결과가 이를 잘 드러낸다. 참여자에 극빈층이나 고소득층은 적고, 83%가 1인당 연 소득이 2만~5만달러(약 2800만~7000만원) 수준 중하위 계층 거주지에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하위 중산층이 우파 포퓰리즘에 더 쉽게 동원될 수 있는 이유로 이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갈수록 하락하고, 그로 인한 경제적 불안이 더 커진 탓으로 본다.



지난 1월19일 서울에서 일어난 서울서부지법 사태는 4년 전 있었던 미 의회 폭동과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거짓 선동과 음모론에 터 잡아 헌정 체제를 부정하는 폭력으로 분출됐다. 다만 서부지법 폭동 참여자들이 누구인지 아직 모자이크가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다. 분명한 건 한국도 미국에 뒤지지 않을 만큼 양극화가 심각하고 자산과 소득 불평등도 계속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단주의가 자라날 토양이 갈수록 비옥해지고 있는 셈이다.



윤석열이 탄핵되고 그와 공모한 친위 쿠데타 세력 몇몇이 처벌받는다고 극단주의 세력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의회 폭동 뒤 4년 만에 트럼프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고, 미국 사회는 더 극단적 분열로 치닫고 있다. 민주주의도 빠르게 후퇴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소득과 자산의 분배를 더 고르게 하지 못한다면 비옥한 양극화 토양 위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제2의 윤석열 같은 인물의 출현을 다시 목도할지 모른다. 그래선 안 된다.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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