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미술 문외한인 저널리스트
구겐하임 경비·작가 조수 등 취직해
구겐하임 경비·작가 조수 등 취직해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비앙카 보스커 지음|오윤성 옮김|RHK|480쪽|2만3000원
뉴욕에 거주하며 굴지의 경매 회사에서 아트 비즈니스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VIP 고객들이 좋은 작품을 선점한 후 개막하는 아트페어의 생리에 대한 강의가 있던 날 “그건 공정하지 않잖아요” 했더니 모두가 웃었다. 강사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아트페어에는 공정함이란 없어요”라고 말할 때 혼자만 아트월드의 이방인인 것 같아 겸연쩍었다. 그렇지만 그 ‘이방인의 감각’이 저널리즘의 기본이다. 현장에 있지만 속하지는 않으며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경계인으로서의 감각. 미국 저널리스트 비앙카 보스커의 이 책은 그런 감각으로 뉴욕 현대미술 생태계를 파헤친 논픽션이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쓴 미국 기자 비앙카 보스커./ⓒ Bianca Bosker |
전작 ‘코르크 도크(Cork Dork)’(2017)에서 미국 최고급 와인 산업계의 이면을 파고든 저자는 이번엔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을 노려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음미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우고 싶다는 욕망으로 다짜고짜 미술계로 뛰어든다. 언론을 경계하는 화랑주를 설득해 브루클린의 작은 화랑 인턴으로 취직한다. 화랑주 잭은 저자에게 머리카락을 칼같이 자르고 액세서리는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작품이 판매됐다’라는 표현도 사용 금지. “말이 좀 싸 보이잖아요. 그 대신에 ‘소장이 결정되었다’라고 표현하면 돼요.”
졸업을 앞둔 예일대 미대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잭은 ‘전업 작가로 성공하는 법’을 이렇게 말한다. “예일대 학위는 도움이 돼요. 그렇지만 여자라는 성별은 도움이 안 돼요. ‘다들 곧 애 엄마가 된다’는 이유로 여성 작가의 작품을 일절 구매하지 않는 컬렉터들도 있어요. 큰 그림은 도움이 안 돼요. 손바닥만 한 맨해튼의 공동주택 엘리베이터에 안 들어가는 작품은 안 팔리거든요.” 인맥을 잘 쌓고, 아무 데서나 전시회 갖지 말라는 팁이 이어지는 동안 저자는 무언가 빠져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작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이 전시장에 남성용 소변기를 가져다 뉘여놓고 ‘샘’이라는 제목의 조각이라 선언한 후, 미술계에 예술 작품의 핵심은 작품 배후에 있는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개념미술이 현대미술의 주류가 된 1960년대 이후 미술계는 기교가 뛰어난 작품을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생각이 사물을 이긴다, 예쁘장한 것은 수상하다, 표면의 광택을 믿어선 안 된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과연 작품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의미가 없나?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내 취향이 저급해서일까? 작품에 대한 취향에도 우열이 있나? 저자는 혼란에 빠진다. “맥락을 잘못 짚을까 봐, 옷을 잘못 입을까 봐, 잘못된 작품을 좋아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나만의 견해를 가질 수조차 없었다.”
이야기는 저자가 잭과 헤어지고 다른 갤러리에 취직해 겨울 시즌 미술계의 가장 큰 시장인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에서 작품을 팔고, 줄리 커티스라는 작가의 조수로 일하고, 구겐하임 미술관 경비원으로 취직하는 과정으로 박진감 있게 이어진다. 줄리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저자는 예술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빼라는 주장은 건강을 위해 소금을 끊으라는 조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저자는 한 구역을 지키는 40분 동안 단 한 작품만 바라보는 실험을 한다. 브랑쿠시의 작품이 수차례 다시 보이더니 종국엔 사물이 아닌 벗으로 느껴질 때 깨닫는다. “억지로라도 예술 작품과 관계를 맺을 때 작품이 달라지고 자신이 달라진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해 저자는 “우리의 현실 인지는 예측 기계인 뇌가 만들어낸 환시(幻視)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예술은 그 예측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우리를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삶을 음미하는 연습인 동시에 음미할 가치가 있는 삶을 창조하는 연습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현실을 창조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목적 의식을 가진 현실을 창조할 수도 있다. 나는 어느덧 줄리와 비슷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줄리처럼 현실이라는 이름의 환시에 의문을 품고 현재를 직접 만드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작품이 전시장 흰 벽에 걸린 프리즈·키아프 주간, 독자들에게 권하고픈 단 한 권의 책이다. 원제 Get the Picture.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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