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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내내 마르지 않은 ··· 살아남은 자의 눈물

매일경제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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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내내 마르지 않은 ··· 살아남은 자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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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이전에 구멍이 있었다. 1965년 뉴욕으로 건너간 김창열(1929~2021)에게는 가난이 전쟁보다 힘들었다. 뉴욕에서 김창열은 앵포르멜 화풍으로 트라우마였던 전쟁의 상처를 구멍의 형태로 거칠게 표현했다. 정제된 화면 위에 기하학적 형태와 착시적 공간감을 표현한 이 실험은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했다. 과도기를 거쳐 김창열은 마침내 물방울에 도달한다. 1969년 뉴욕에서 파리로 이주해 물 새는 다락방에 정착했다. 쌀도 화장실도 없이 신혼 생활을 하며 자신의 조형 언어를 찾으려 마굿간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현상' 연작은 인체의 장기처럼 원형의 점액질로 표현된다. 둥글둥굴한 원형의 드로잉을 거쳐 종국에는 화폭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김창열의 뉴욕 시기 미공개 회화 8점과 드로잉 작업 11점, 최초의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밤에 일어난 일'(1972)보다 앞서 제작된 1971년의 물방울 회화 2점이 최초로 공개됐다.

1969년작 '무제'

1969년작 '무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창열의 작고 이후 첫 대규모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8월 22일 시작돼 12월 21일까지 열린다. 6·7·8전시실에 상흔, 현상, 물방울, 회귀 네 개의 주제로 대표작 120여 점을 펼쳐 보인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미흡했던 김창열 작가에 대한 연구를 심화해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동시대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미술의 가을'에 이 대형 회고전을 기획한 이유를 밝혔다.

평안남도 맹산 출신인 김창열은 16세에 홀로 월남해 고향을 떠났다. 해방과 분단,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그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예술세계 전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이번 전시에는 희귀작이 많다. 앵포르멜 이전 시기의 작품으로는 처음 공개되는 1955년 작 '해바라기'와 경찰 시절 경찰전문학교의 격월간지 '경찰신조'의 표지화 등에서는 그의 구상화 시절을 만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김창열은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망을 품고 상처를 형상화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을 주도하며 한국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다.


전시를 기획한 설원지 학예연구사는 "1965년 총알을 맞은 인체 살갗을 표현한 앵포르멜 회화를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출품했는데 구멍들이 거칠게 표현된 이 작품을 통해 상처가 물방울에 이르는 여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67년 '제사'는 저승처럼 어두운 색조 위에 획을 그어 떠나간 이들의 넋을 기린다. 뉴욕에서도 캔버스를 통해 떠나간 이들을 위로했다. 이 시기 그림들은 캔버스에 자신의 상처를 아로새긴 것처럼 처연하고, 마크 로스코처럼 울림을 준다. 김창열은 "6·25 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였다"고 토로했다.

1986년작 '물방울'  국립현대미술관

1986년작 '물방울'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세 번째 공간인 '물방울'은 1973년 초기 물방울부터 후기 물방울까지 대표작을 전시한다. 어두운 조명 아래 '물방울의 방'처럼 물방울 하나를 그린 대작들을 미로처럼 숨겨놓은 공간은 이번 전시의 백미다.


파리에서 김창열 작가의 문패에는 이름 대신 물방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 덕분에 자연스레 '무슈 구트(Monsieur Gouttes, 물방울 씨)'로 불렸다. 물방울 씨의 작업실도 재현됐다. 지상에서 지하로 이어진 전시장은 더 어둡고 동굴처럼 꾸며졌다. 파리 그랑 팔레 등 유수의 미술관 전시를 디자인한 아드리앵 가르데르가 이번 전시장을 꾸몄다.

가르데르는 "김창열의 평창동 창문 없는 지하 작업실을 우규승 건축가는 엄마의 자궁 같은 곳이라고 했다. 높은 층고와 지하를 활용해 그 공간을 재현하고 싶었다. 창작 과정을 보여주고자 그의 빈 캔버스를 가득 비치했다"고 설명했다. 아틀리에 같은 이 공간에는 파리에서 가져와 처음 공개되는 상흔과 물방울이 함께 그려진 1986년작 '물방울' 소품 2점이 나란히 걸려 있으니 놓치지 말자.

1980년대 중반, 김창열은 화면에 문자를 도입했다.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리는 과정에서 글자와 이미지가 맺는 긴밀한 관계에 주목했고, 이는 천자문을 활용한 '회귀' 연작으로 이어졌다. 작가에게 천자문은 단순한 글이 아닌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인식하는 기호였다. 이는 유년으로의 회귀이자 동양적 정서의 환원 의지였다.


노년에 이르러 '회귀' 연작은 삶의 상흔을 붓질로 꿰매는 진혼의 행위로 승화됐다. 만년의 작가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도 물방울이 되고 싶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8전시실에서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상형시 'Il pleut(비가 온다)'에 착안해 제작한 'Il pleut(비가 온다)'(1973년)도 소개된다. 물방울로 시의 구조를 번역해낸 이 작품은 국내외에서 처음으로 전시된다. 르몽드지에 그린 드로잉,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록과 작업실 풍경을 담은 대형 사진도 이 공간에 걸린다.

설 학예연구사는 흥미롭게도 작가의 '노란색'에 주목했다. "전쟁의 참혹기에도 노란색 바탕에 스크래치를 그은 작업이 많았고, 물방울도, 회귀도 노란 바탕의 작업이 많았다. 인간의 죽음을 체험하면서도 삶의 생명력을 부여잡고 있었던 걸 상징하는 게 노란색이지 않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족을 통해 전해진 작가의 마지막 육성은 "나는 여전히 못 그린 물방울이 많다"였다. 50년을 그렸는데도 그에게는 더 흘러내릴 물방울이 남아 있었나 보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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