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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위로하고 위로받는 연극

조선일보 김일송 책공장 이안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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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위로하고 위로받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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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다 보니 모든 게 걱정투성이다. 위로도 훈계도 아직은 상상 속 일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어디 멍이라도 들어서 온다면 누구에게 맞은 건 아닐까,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까 걱정이다. 그 반대는 더 문제다. 혹시 아이가 누굴 때리고 들어오면 그때는 무슨 말로 훈계해야 할까.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럴 때 소설이나 영화, 연극이 도움 된다. 최근 본 연극 ‘헬로 나의 섹슈얼리티’도 그랬다. 제목이 혹시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야릇한 상상과 달리, 매우 건강한 청소년극이다. 매일 여고생 나리와 남고생 민욱의 이야기가 번갈아 무대에 올랐다. 인기 많은 남자 친구를 붙잡고 싶은 마음에 깊은 관계가 된 나리는 얼마 안 가 남자 친구와 멀어지고 친구들과도 다툰다. 여자 친구와 깊은 관계라고 주변에 허세를 부리다가 여자 친구에게 차인 민욱은 모든 걸 단짝 친구 탓으로 돌리다가 결국 그 단짝 친구마저 잃는다.

연극 주인공은 문제 상황에 내몰린 학생들이다. 그런데 1시간여 짧은 공연 뒤 관객 토론에선, 흥미롭게도 주인공 학생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 관객에게 질문한다. 극중 나리의 엄마는 묻는다. “어설픈 사랑으로 상처받은 나리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요?” 민욱의 담임교사는 묻는다. “거짓말로 모두에게 상처를 준 민욱을 어떻게 훈계해야 할까요?” 그때부터 오픈 채팅방에 불이 난다. 관객들의 진지하면서도 재치 있는 농담과 그들 나름의 해결책이 줄을 잇는다.

누군가는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강요받은 관계의 트라우마로 성인이 된 지금도 연애를 못 해요. 나리는 저 같은 어른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나리가 상처를 극복할 수 있게 함께 고민해 주시면 제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용기 있는 고백에 모두가 제 일처럼 나리를, 그리고 이름 모를 관객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때 생각했다. 이건 집단적 체험을 공유하는 공연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위로하며 위로받았다.

[김일송 책공장 이안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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