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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 모른 채 약 먹고, 병원 찾다 허송세월··· '여성 건강권' 방치한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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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 모른 채 약 먹고, 병원 찾다 허송세월··· '여성 건강권' 방치한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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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살롱] 낙태죄 폐지 6년, 바뀐 게 없다
헌재 판결 후에도 '임신중지' 법·제도 공백
WHO 2005년 필수의약품 등재한 미프진
한국에선 설명 없이 유통되고 병원도 못 써
처벌 강화할수록 여성은 위험한 곳 몰린다
초기 접근권 높이고 건강권 문제로 다뤄야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 합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나영 대표가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2019년 설립된 셰어는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발간,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 제안 등 모든 사람의 성과 재생산 영역에서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차별 없이 보장받을 수 있도록 법·제도 제안, 당사자 지원 등 활동을 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나영 대표가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2019년 설립된 셰어는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발간,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 제안 등 모든 사람의 성과 재생산 영역에서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차별 없이 보장받을 수 있도록 법·제도 제안, 당사자 지원 등 활동을 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이미 오래전부터 임신중지(낙태)는 불법이 아닙니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이후 법 효력이 사라져서죠.

하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임신중지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 헤매고, 성분명도 부작용도 제대로 알 수 없이 암암리에 유통되는 무허가 임신중지 약물에 의존해야 합니다. 현금만 받는 고액의 병원비도 부담이지요. 국회와 정부가 6년간 '양질의 임신중지'를 위한 법·제도 개편에 손을 놓은 탓입니다. '제도 공백'으로 인한 장벽은 청소년,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에게 더 높습니다.

대표적으로 제품명 '미프진'으로 알려진 미페프리스톤 성분의 약을 비롯해 임신중지 약물(미페프리스톤·미소프로스톨)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이미 2005년 필수의약품에 등재해 전 세계 약 100개국에서 사용 중이지만, 한국에선 합법적으로 구할 길이 없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대체입법(형법·모자보건법)이 선행돼야 한다'며 약물 허가를 차일피일 미뤄왔기 때문입니다.

임신중지 경구약 미프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임신중지 경구약 미프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캐나다는 이미 1998년 임신중지가 전면 허용됐고 뉴질랜드, 영국(하원) 등 주요국도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반면 한국은 소파술(자궁 내막을 긁어내는 방법)처럼 국제적으로 더는 권장되지 않는 옛날 방법이 여전히 쓰이죠."

임신중지 관련 정책 제안과 당사자 지원 등을 하는 단체 셰어(SHARE·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의 나영 대표의 설명입니다. 그를 지난 25일 만나 임신중지 의료 체계 부재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점과 풀어야 할 과제를 들어봤습니다. 아래는 일문일답.

문턱 높일수록 여성은 위기에 몰린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2019년 4월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을 촉구한 지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며 기뻐하고 있다. 헌재는 낙태죄 효력을 2020년 12월 31일까지로 두고 그전까지 개선된 법안을 만들라고 국회에 요청했지만 현재까지도 대체입법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2019년 4월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을 촉구한 지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며 기뻐하고 있다. 헌재는 낙태죄 효력을 2020년 12월 31일까지로 두고 그전까지 개선된 법안을 만들라고 국회에 요청했지만 현재까지도 대체입법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6년 전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달라진 게 있나요.

"헌재 결정 이후에도 양질의 임신중지 지원체계가 전혀 마련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임신중지를 한다'고 공개하는 병원은 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진료비 기준이나 1차 의료기관(의원)부터 3차 의료기관(상급종합병원)에 이르기까지 각기 어떤 의료 서비스를 책임 있게 제공하는지 등이 전혀 정리돼 있지 않아요. 안전한 약물도 병원에서 쓸 수 없고요. 병원에서 수술비를 현금만 받거나, 법적 문제가 없는데도 임신중지 시 상대 남성이나 부모 동의를 요구하는 것도 제도적인 정비가 돼있지 않아 벌어지는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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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부족, 높은 비용, 제3자 동의 요건 등은 현실에서 어떻게 문제가 되나요.


"적기를 놓치고 그로 인해 더 큰 위기에 놓이는 게 가장 문제예요. 일단 임신중지가 가능한 병원을 찾기 어렵고, 온라인에서 알음알음 병원 정보를 알아내도 돈을 구하기 어려울 수 있죠. 특히 청소년은 '부모님 데려오라'는 게 또 다른 장벽이고요.

이런 문턱 때문에 임신 6주 차부터 방법을 찾던 사람도, 몇 번 병원에서 거절당하거나 돈이 없어 고민하다 보면 금세 2, 3주가 지나요. 임신주수가 늘수록 병원은 더 찾기 어렵고요. 초기일수록 흡입술, 약물로 임신중지가 가능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병원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수술비 때문에 돈을 빌리거나, 무리하게 일을 많이 하다가 2차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요. 병원에서 '파트너 동의가 필요하다'고 요구해서 말했다가 상대 남성이 도망가는 경우도 많죠."

※건강보험 체계 밖에 놓인 '임신중지' 비용은 병원마다 천차만별입니다. 나영 대표는 보통 60만 원에서 150만 원 사이라고 했는데, 임신주수가 높아지면 수백만, 수천만 원대로 고공행진합니다. '제도 공백'을 악용해 일부 의료기관이 돈벌이에 나서는 탓입니다. 온라인에서 무허가로 유통되는 미프진 등도 수십만 원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소년 등 누군가는 당장 구하기 힘든 돈입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2021년 3월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임신중지를 공적 의료 서비스로 보장하기 위한 건강보험 적용과 유산유도제(미프진)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2021년 3월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임신중지를 공적 의료 서비스로 보장하기 위한 건강보험 적용과 유산유도제(미프진)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의료 현장은 어떤 상황인가요.

"임신중지가 오랫동안(1953년 형법 제정 이후 66년 동안) 불법이었기 때문에 의료인들도 최신 의료 가이드라인이나 시술 방법을 모릅니다.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약물이나 흡입술처럼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데도, WHO가 더 이상 권고하지 않는 소파술이 최근까지도 사용되는 이유예요. 임신중지 제도화와 함께 의료인들에 대한 가이드 마련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완전 비범죄화' 권고한 세계보건기구


-WHO는 임신중지에 대해 어떻게 권고하나요.

"WHO는 2022년 임신중지 가이드에서 '완전 비범죄화'를 권고했어요. 처벌 중심의 접근이 임신중지를 줄이는 데 효과가 없고, 도리어 여성 건강권을 침해한다는 게 수십 년간의 통계와 연구로 확인됐기 때문이죠.


특정 주수부터 금지하면 마치 그 전에는 다 되고, 그 뒤에는 임신중지를 안 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요. 병원 찾고, 진료 예약하고, 기다려서 검사하고, 시술 날짜 잡고 하면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2~3주가 걸리죠. 또 병원에서 몇 차례 거부당하거나, 나이·지역·직장·상대방과 관계 등 각자의 상황까지 맞물리면 5~6주까지도 늦어지고요.

법에서는 '14주까지 가능하다'고 기준을 정해도 실제로는 8주부터 막히고 위기에 몰리는 셈이죠. 이런 장벽을 아예 없애자는 겁니다. 규제와 처벌을 강화하면 초기에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었던 사람도, 후기까지 늦어지고 결국에는 더 열악한 곳을 찾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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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미국 텍사스주는 2021년 '임신 6주 이후 임신중지 금지법'을 도입한 이후, 이듬해 '생후 1년 이내 영아 사망률'이 전년 대비 12.9% 급증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강도 높은 처벌이 오히려 부작용을 부른 사례죠. 반대로 캐나다는 1988년 임신중지 전면 허용 이후 제도적 보장을 강화해 오히려 낙태율이 이전보다 하락해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임신중지 합법화를 요구하는 모임 비웨이브(BWAVE)가 2018년 6월 10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임신중지 합법화를 요구하는 모임 비웨이브(BWAVE)가 2018년 6월 10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생명권 보호는 어찌하냐는 반론도 있을 텐데요.

"후기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고 생명권이 보호되는 게 아니라, 보건의료시스템을 구축해서 초기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야 해요. 애초에 중기, 후기까지 안 가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거죠.

보통 임신 중기(14~27주) 이후로 넘어가는 경우는 청소년 등 병원에 가는 데 어려움이 있거나, 경제적 어려움, 폭력적 상황에 놓인 경우, 상대 남성의 갑작스러운 잠적, 급격한 건강 악화에 의한 임신중지가 필요한 경우에요.

후기까지 갔다면 의료기관에서 상담을 통해 출산 시 관련 지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당사자의 필요에 따라 기관에 연계하도록 해야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중지가 필요한 상황이 있다면 3차 의료기관에서 안전하고 전문적인 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하고요."

"정부, 건강권 관점에서 제도 알려야"


-임신중지 약물 도입이 이재명 정부 국정과제에 포함됐습니다.


"늦었지만 다행이지요. 국회 역할인 대체입법과 정부의 미프진 도입은 별개 문제거든요. 법안에 몇 주까지 약물로 임신중지가 가능하다는 식의 내용이 담길 필요가 없고, 식약처가 WHO 가이드 등을 참고해서 심사·허가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WHO 권고는 10주까지는 의사 외 의료종사자도 약을 통해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12주까지는 병원에 머무르지 않고도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고 돼 있어요. 정부 의지만 있다면 당장 할 수 있습니다."

2022년 인천본부세관이 적발한 중국산 불법(무허가) 임신중지 약품과 가짜 포장지. 일당은 중국에서 9정 1세트에 6만 원 정도인 중국산 약을, 미국에서 정식 유통되는 약품인 것처럼 이른바 '포장갈이'해 1세트에 36만 원을 받고 되팔아 22억여 원 범죄 수익을 올렸다. 이들은 전문 교육을 받은 약사인 것처럼 속여 구매자들과 상담을 하기도 했다. 인천본부세관 제공

2022년 인천본부세관이 적발한 중국산 불법(무허가) 임신중지 약품과 가짜 포장지. 일당은 중국에서 9정 1세트에 6만 원 정도인 중국산 약을, 미국에서 정식 유통되는 약품인 것처럼 이른바 '포장갈이'해 1세트에 36만 원을 받고 되팔아 22억여 원 범죄 수익을 올렸다. 이들은 전문 교육을 받은 약사인 것처럼 속여 구매자들과 상담을 하기도 했다. 인천본부세관 제공


-현재도 암암리에 유통되는데, 정식 허가가 되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온라인은 둘째 치고, 지금도 병원에서 미소프로스톨을 오프라벨(정부가 승인한 용처 대신 다른 목적으로 허가 외 사용)로 사용해 약물 임신중지를 하기도 해요. 그럼에도 당사자에게 안전성에 대한 설명과 용법, 부작용 등을 충분히 안내하지 않죠. 미페프리스톤을 함께 쓰지 못해서 효과가 다소 떨어지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것은 약 성분과 용량, 상품명, 복용법, 부작용, 제대로 임신중지가 된 것인지 아닌지 등 의료 정보를 이용자가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조속한 공식 약물 도입과 함께 의료 정보가 제공돼야 하는 이유입니다."

-약물 도입 외에도 정부가 해야 할 일은요.


"의료인에 가이드를 제공하고, 건강보험 급여화 등 체계를 마련하고, 나아가 국민들에게도 임신중지가 어느 수준까지 건강권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려야 해요. 임신중지를 이제 건강권과 복지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것을요.

관련 제도들이 잘 갖춰진 캐나다, 뉴질랜드 같은 나라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임신중지 제공 병원과 병원마다 어떤 의료 서비스가 있는지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거든요. 어느 병원은 몇 주까지 약으로, 몇 주까지는 시술로, 그 이후에는 상급병원에 가야 한다는 식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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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 낙태 처벌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라고 판단한 헌재 결정
(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4111750028664)

캐나다의 '섹스 앤드 유(SEX&U)'라는 기관은 임신중지를 비롯한 성 관련 상담을 남녀노소 누구든지 할 수 있게 트램과 버스 한복판에 홍보물이 붙어 있어요. 접근성을 높이는 겁니다. 임신중지, 피임뿐만 아니라 성적인 관계 맺음을 둘러싼 의사소통과 상호 존중 등을 가르치는 포괄적 성교육 역시 필요하고요."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