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세로 포복하고 있는 ‘웅크린 거미’(2003)가 전시장을 꽉 채웠다. 청동에 갈색, 광택 처리된 파티나, 스테인리스 스틸. 270.5×835.7×627.4cm. 뉴욕 이스턴 재단 소장품으로 국내 처음 공개됐다. /허윤희 기자 |
낮은 자세로 포복하고 있는 거미 한 마리가 전시장을 장악했다. 한껏 웅크린 몸,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공격적인 태세다.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의 대형 청동 조각 ‘웅크린 거미’. 1978년 퍼포먼스 실황 영상이 흐르는 뒷면 스크린에선 “엄마는 나를 버렸어”라고 노래하는 여성 퍼포머의 고음이 고막을 때린다.
‘거미’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가 25년 만에 한국에 상륙했다.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은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부르주아의 개인전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을 30일 개막한다. 국내 미술관 회고전은 2000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이후 처음으로, 회화·조각·설치 등 106점의 작품을 아우른다. 시드니·도쿄·타이베이를 거친 아시아 태평양 순회 전시의 마지막 여정으로 호암미술관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루이즈 부르주아, '꽃(2009)'. 종이에 과슈, 12점 연작. 59.7x45.7cm. 사진: 크리스토퍼 버크 ©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SACK, Korea. /호암미술관 |
루이즈 부르주아 개인전 전시 전경. 개념미술 작가 제니 홀저가 부르주아의 텍스트를 발췌해 공간에 투사한 프로젝션 작품도 함께 전시됐다. /허윤희 기자 |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부르주아는 자전적 서사를 접목시킨 예술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어린 시절의 기억, 사랑과 증오,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내면의 균열은 생애 전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고, 개념도 아니다. 내가 재현하고 싶은 것은 감정이다. 갈망하고, 내어주고, 파괴하려는 감정.” 작가 자신의 고백이 1층 전시장 출구 앞에 새겨져 있다.
루이즈 부르주아, ‘좋은 엄마’(2003). 자식에게 모유를 먹이는 건 숭고한 일이지만, 아이에게 늘 묶여 있어야 하는 엄마의 양가적 감정을 표현했다. 천, 실, 스테인리스 스틸, 목재, 유리. 뉴욕 이스턴 재단 소장. /허윤희 기자 |
루이즈 부르주아, '나는 되돌린다(내부 요소·1999~2000)'. 젖먹이 아이가 배가 고파 엄마를 붙잡고 있지만, 젖을 주지 않고 땅바닥에 버리고 있는 '나쁜 엄마'를 표현했다. 철, 에나멜, 유리, 목재. 프랑스 샤토 라 코스트 소장. /허윤희 기자 |
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거미’는 그의 엄마다. 부르주아의 부모는 태피스트리를 복원해 갤러리에 판매하는 일을 했다. 어린 시절 태피스트리 작업장에서 실을 짓던 엄마의 모습이 마치 거미줄로 집을 짓는 거미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진아 큐레이터는 “거대한 거미 조각은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하지만, 거미 드로잉은 1940년대부터 나온다”며 “거미는 모성에 대한 작가의 양가적인 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자신을 양육하고 보호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버린 존재. 부르주아는 태어나는 순간, 자궁에서 분리되면서 인간은 엄마로부터 버려진다고 여겼다. 이번 전시에선 국내 처음 공개되는 ‘웅크린 거미’를 비롯해 총 3점의 거미 조각을 볼 수 있다. 호암미술관의 전통 정원 ‘희원’에 상설 전시된 ‘엄마(Maman)’ 외에도 또 다른 조각 ‘거미’가 야외에 놓였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초대형 거미 조각 '엄마(마망·1999)'. 청동에 질산은 파티나, 스테인리스 스틸, 대리석. 1024.6×927.1×891.5cm. /호암미술관 |
작품을 형성하는 서사는 대부분 부모에게서 비롯됐다. 어머니의 투병에도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운 아버지는 지독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식탁에서 귤껍질을 까며 “우리 딸도 이렇게 예뻤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농담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를 끌어내려 사지를 찢고 먹어 치우는 상상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시뻘건 조명 아래 고깃덩이가 식탁에 올려진 작품 ‘아버지의 파괴’는 이러한 환상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루이즈 부르주아, '아버지의 파괴(1974-2017)'. 보존용 폴리우레탄 수지, 목재, 천, 붉은 조명. 237.8×362.3×248.6cm. 사진: 크리스토퍼 버크 ©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SACK, Korea. /호암미술관 |
전시는 부르주아의 내면을 보여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 구조로 연출됐다. 1층은 의식을 상징하는 밝은 공간, 2층은 무의식을 상징하는 어두운 공간이다. 1940년대 초기 회화와 ‘인물’ 연작부터 1990년대에 시작된 대형 ‘밀실’ 연작, 말년의 패브릭 작업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작업 여정을 따라가며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든다.
남녀의 성기를 결합한 조각 ‘개화하는 야누스’처럼 그의 작품엔 야누스적인 이중성이 공존한다. 사라지는 것과 영원한 것, 남성와 여성, 과거와 현재,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충돌하는 감정이 녹아있다. 결국 로비에서 만나는 말기의 걸작 ‘커플’에 이르면, 평생에 걸친 갈등이 궁극적인 화해와 통합으로 마무리된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연상시키는 두 개의 나선형 인간이 공중에 매달려 회전하면서 하나로 융합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루이즈 부르주아, '커플(2003)'. 알루미늄. 365.1x200x109.9cm. 사진: 조너선 라이언후브우드©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SACK, Korea. /호암미술관 |
부르주아의 일기와 생애 전반에 걸친 글쓰기, 정신분석 기록을 병치해 보여주는 방식도 이번 전시에서 도드라진다. 한때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던 부르주아는 33년간 정신분석을 받았다. 특히 1952년부터 1967년까지 꿈 기록, 작업 노트 등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작가의 기억과 트라우마,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과 긴장을 통해 한 개인이 평생에 걸쳐 질문한 주제가 어떻게 동시대적인 예술 언어로 확장됐는지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내년 1월 4일까지. 성인 1만6000원.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
청동 거미 조각 '마망'의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 /호암미술관 |
파리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타계했다. 자전적 경험과 감정의 층위에 기반한 작업으로 20세기 현대미술에서 독자적 위상을 구축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작업 전반에 지속적으로 반영되며 창작의 원천이 됐다. 1938년 미술사학자 로버트 골드워터와 만난 지 19일 만에 결혼한 뒤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설치, 퍼포먼스, 드로잉,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었으나 조각가로 널리 알려졌다.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 전시를 계기로 제도권 미술계의 중심에 섰고, 199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런던 테이트 모던의 대표작 ‘마망’ 설치를 통해 세계적 명성과 대중적 인정을 동시에 얻었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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