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의 주거 지역. 한수빈 기자 |
서울 관악구 한 다가구주택에서 방 16개로 원룸 임대업을 하는 A씨는 최근 보증금 반환 걱정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오는 28일부터 주택금융공사 전세자금보증 요건이 강화되면 전세 세입자를 한 명도 못 받을 것 같아서다.
A씨는 25일 통화에서 “전세사기 사태 이후 3년간 원룸의 절반 정도를 월세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모든 자산을 팔아치워 현금 4억원을 마련했다”며 “이제 또다시 3억여원을 마련해야 하는데 눈앞이 캄캄하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예방을 위해 주택금융공사(HF)가 최근 임차 주택의 전세보증 심사 요건을 강화하면서 임대인들 사이에서 반발이 나오고 있다. 전세사기 방지를 위한 조치이지만 주택금융공사의 전세대출이 막히면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임대인들은 대출 기준이 되는 주택 가격 산정 요건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HF는 지난 4일 홈페이지를 통해 은행 재원 일반전세자금보증과 무주택 청년 특례전세자금보증의 신규 신청자에게 28일부터 강화된 심사 기준을 적용한다고 공지했다. 이에 따라 임차 대상 주택에 걸린 선순위채권과 임차보증금의 합계가 주택 가격의 90%를 넘으면 보증이 거절된다. 주택 가격의 산정 기준은 공시가격의 140%다. 기존에는 전세자금 보증 금액이 2억을 넘는 등 일부 건에 대해서만 선순위채권과 전세보증금을 합산해 심사가 진행됐다. 전세자금 2억원까지는 주택에 걸린 선순위 채권만 심사하고 임차보증금은 고려하지 않았다. 보증금 2억원 미만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된 것이다.
HF 관계자는 “국회와 감사원의 지적을 반영하여 보증금 미반환 위험으로부터 임차인을 보호하고 안전한 임대차 관행을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전세사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조치인 셈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전세사기 사태 여파로 2년 전부터 이미 HF의 강화된 기준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다세대·다가구주택 등 비아파트 임대인들은 “정부가 비아파트 현실을 너무 모른다”며 반발하고 있다. 전세사기 사태 이후 전세가 월세로 빠르게 전환되는 동안 HF의 전세보증이 있어 그나마 숨통이 틔었는데, HF 전세대출도 막히면 새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임대인들은 특히 주택의 가격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같이 ‘공시가격의 140%’로 산정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3년간 공동주택 공시가격을 2020년 수준으로 낮게 유지하면서 비아파트 공시가격이 실거래가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일례로 서울 관악구의 한 다가구주택은 2018년 17억8000만원에 거래됐으나 올해 공시가격은 8억700만원에 불과하다.
원룸·투룸 등으로 이뤄진 이들 비아파트 주택은 공시가격은 낮지만 전세가율은 아파트보다 훨씬 높다. 공시가격의 140%를 적용하더라도 기존 임대차보증금을 넘어서는 경우가 흔하다. 예컨대 서울 영등포구의 한 다가구주택은 원룸 13가구를 세놓아 임대보증금이 13억원이지만, 주택의 공시가격은 7억8000만원에 불과하다. HF기준을 적용하면 이 주택은 임대보증금의 합이 9억8000만원을 넘지 않아야만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가 전세대출을 받을 수 있다.
다가구주택의 경우 원룸 한 곳에서만 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발생해도 새로운 임대차계약이 줄줄이 막히며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는 수순이다. 임대인들은 HF의 심사 강화로 전세가율이 특히 높은 관악구 등지에서 보증금 미반환 사례가 속출할 것으로 본다.
비아파트 임대인 단체인 한국임대인연합은 26~27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집회를 열 예정이다. 한재호 한국임대인연합 관악구지회장은 “주택가격 산정 기준을 현실화할 때까지 HF의 전세자금보증 심사 강화를 유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전세보증 축소는 바람직하지만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속도를 조절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조정흔 경제정의실천연합 토지주택위원장은 “전세보증을 축소하는 방향은 바람직하지만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 여력이 갑자기 줄어들면 임차인의 주거 안정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시행 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현재의 공시가격이 주택 가격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임대인에게 보증금 분할상환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충격 완화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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