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화백 작고 이후 대규모 회고전 처음 열려
초기작부터 대표작까지 체계적으로 조명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 12월 21일까지
초기작부터 대표작까지 체계적으로 조명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 12월 21일까지
김창열의 2013년 작 ‘회귀’. 천자문 위에 물방울이 영롱하게 맺혀있는 작품이다. 다섯 살 무렵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운 김창열은 유년 시절 습자지에 글자를 쓰던 기억을 되살리듯 화면을 천자문으로 촘촘히 채우고, 단정한 서체 위에 물방울을 배치했다. 200×500cm.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
“40년을 물방울만 그리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다른 건 그릴 줄 모르니까요.”
물방울 하나로 세계 화단에 이름을 떨친 화가 김창열(1929~2021)은 88세 때 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쏭달쏭 선문답 같은 말이다. 캔버스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 금방이라도 또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물방울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가 왜 평생 물방울에 천착했는지 누구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2일 개막한 ‘김창열’ 회고전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지난 2021년 작고한 이후 국공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대규모 회고전이다. 미공개 작품 31점을 포함해 120여 점이 대거 출품됐다. 전쟁의 상처를 응시한 거칠고 무거운 초기 작품을 시작으로 미국 뉴욕 시절 정체성과 존재의 위기를 드러낸 냉철한 추상, 프랑스 파리에서 완성된 ‘물방울’까지 김창열 회화의 전개 과정을 세밀하게 탐색했다. 상흔, 현상, 물방울, 회귀의 4개의 장으로 전시가 펼쳐진다.
김창열, 1965년작 ‘제사’. 상단에 그려진 두 개의 총알 자국은 마치 눈 같고, 아래의 탱크 바퀴 자국은 입 같아서 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얼굴처럼 보인다. 162×130cm. /국립현대미술관 |
김창열, '제사'(1966). 162×137cm. /국립현대미술관 |
물방울의 시작은 총알 자국이었다.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열다섯에 홀로 월남한 뒤 서울에 있는 화가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을 배웠다. 1949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지만 6·25전쟁이 발발해 학업을 중단했다. “6·25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였다.”
김창열은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를 창립하며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추상회화 운동인 앵포르멜을 주도했다. 그에게 앵포르멜은 전쟁의 상처를 화면에 각인시키고 죽음을 위로하는 제의(祭儀)와 같았다. 이 시기 그는 대다수 작품에 ‘제사’라는 제목을 붙인다. 총알 자국, 탱크가 짓밟고 간 육체의 흔적 등 화면에 가득 찬 고통스러운 절규를 초기작에서 볼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설원지 학예연구사는 “거친 표현을 반복하며 시대적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한 시기”라며 “이 총알 자국이 훗날 그를 대표하는 물방울로 발전한다”고 했다.
김창열, 1969년경 ‘무제’. 20.5×20.7cm. /국립현대미술관 |
2장에 전시된 김창열의 '현상' 연작을 살펴보는 관람객들. /연합뉴스 |
1965년 김창열은 화가 김환기의 권유로 뉴욕으로 건너갔지만, 뉴욕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 소비 사회에서 느낀 정서적 이질감은 깊은 소외감과 회의를 안겼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 김창열 회화는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앵포르멜의 두껍고 거친 질감은 사라지고, 매끈하고 정제된 화면 위에 기하학적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969년 그는 뉴욕에서 겪은 단절된 삶을 뒤로 하고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인체의 장기 같은 덩어리에서 점액질이 흘러내리는 듯한 ‘현상’ 연작이 이 시기 대표작. 김창열은 이 때의 작업을 ‘창자 미술’이라 부르며 신체성과 물질성을 탐색했다. 미술관은 “곧이어 등장하는 ‘물방울’ 회화의 전조”라고 봤다.
김창열, '물방울'(1971). 50×50cm.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
그리고 마침내 물방울이 등장한다. 끈적이던 점액질 형상은 1971년 투명한 물방울로 변화한다. 캔버스를 재사용하기 위해 뿌려둔 물이 방울로 맺힌 것을 본 순간, 김창열은 그 안에서 완성된 형태의 충만함을 발견했다. 김창열은 프랑스 외곽의 마구간 작업실에서 물방울에 몰두했고, 1973년 파리에서 연 개인전을 계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개인전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프랑스 국민 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와서 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미술관은 “물방울의 등장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고, 오랜 시간에 걸친 실험과 고민, 철학적 성찰 끝에 이룬 필연적 발견이었다”고 말한다. 김창열에게 물방울은 정화수이자 눈물, 생명, 그리고 무(無)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다양한 상태를 아우르는 상징이었고, 삶과 죽음, 실재와 허상을 넘나드는 조형 언어로 자리 잡았다.
김창열, '물방울'(1986). 73×50cm,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
전시의 마지막, 1965년작 ‘제사’(왼쪽)와 1991년작 물방울 그림 ‘회귀’가 마주보고 있다. 36세 때 그린 ‘제사’에는 울부짖는 듯한 얼굴 형상이 거칠게 드러나 있고, 물방울을 예고하듯 원형의 총알 구멍이 있다. 그 후 26년 뒤의 ‘회귀’에선 물방울이 희미하게 지워진 글자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허윤희 기자 |
전시는 서로 마주 보는 두 점의 작품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1965년작 ‘제사’와 1991년작 물방울 그림 ‘회귀’. 전쟁의 상흔을 짊어진 채 새로운 예술과 구원을 갈망했던 청년 김창열이, 삶의 무게와 침묵 속에서 작업을 이어간 노년의 김창열과 만난다. 설원지 학예연구사는 “작고 전 ‘아직도 못 그린 물방울이 많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김창열에게 물방울은 깨달음의 과정이자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씻어내는 애도의 여정이었다”고 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회고전은 그동안 미흡했던 작가에 대한 연구를 보완하고 공백으로 남아있던 뉴욕 시기의 작품을 통해 김창열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계기”라며 “김창열의 삶과 예술이 지닌 고유한 미학과 정서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12월 21일까지. 관람료 2000원.
[허윤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