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아시아경제 언론사 이미지

[주목 이 판결]법원, 중소 제조기업 '영업비밀 침해'에 30억 배상 판결

아시아경제 최석진
원문보기

[주목 이 판결]법원, 중소 제조기업 '영업비밀 침해'에 30억 배상 판결

서울흐림 / -0.8 °
'기업 핵심 자산 보호' 경종 울려
법원 단호한 의지 드러낸 상징적 판결
피해 회사 대표 9년간 민형사 소송전
"유죄 판결 받고도 버젓이 불법영업"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의 영업비밀을 빼돌려 퇴사한 뒤 같은 업종의 회사를 만들어 영업에 활용한 회사 대표와 공범들에게 30억원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기업이 아닌 중소 제조기업의 영업비밀 침해가 문제 된 사건에서 30억원의 배상액은 이례적으로 큰 금액이다. 조직적인 영업비밀 침해 행위에 대해 엄격한 책임을 묻겠다는 법원의 단호한 의지가 반영된 판결로 평가된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원지법 14민사부(재판장 문현호)는 주식회사 대양이엔아이(대표 박모씨)가 주식회사 이앤비코리아(대표 김모씨) 등 5명의 피고를 상대로 낸 불법행위(영업비밀 침해)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지난달 23일 "피고들은 공동으로 원고에게 30억원 및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먼저 재판부는 이들의 공동불법행위 성립과 관련 "각기 공모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원고의 영업비밀을 가지고 퇴사한 후 피고 회사에 입사해 RTO 설비 제작·판매업을 한다는 계획하에 원고의 영업비밀 또는 영업상 주요한 자산을 반출·사용·누설하거나 이를 방조함으로써 원고에게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위 피고들의 불법행위는 객관적으로 관련 공동성이 있는 공동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손해와 관련해 재판부는 "원고의 손해는 이 사건 영업비밀이 가지는 재산가치"라며 "피고 회사의 기술개발에 드는 비용 감소분과 영업비밀을 이용해 얻은 제품판매이익 중 영업비밀이 없었을 때와의 차액을 감안한 시장교환가격"이라고 했다.

이어 "피고 회사는 수천개의 영업비밀을 얻음으로써 단순히 개개의 영업비밀을 얻은 경우보다 더 큰 이익을 얻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사건 영업비밀의 재산가치도 전체로서 평가함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재판부는 ▲피고 회사가 설립된 2015년부터 2024년까지의 영업이익을 약 54억원으로 평가한 감정 결과 ▲피고들이 이 사건 영업비밀을 사용함으로써 시행착오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현저히 줄일 수 있었다는 점 ▲피고들은 2017년경 이 사건 영업비밀을 모두 삭제했다고 주장하지만, 관련 기술을 활용해 계속 영업을 했으므로 그 핵심 정보들은 피고 회사의 기술 등에 혼화돼 잔존했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점 ▲피고들 행위의 불법성이 중한 점 등을 고려해 손해액을 30억원으로 정했다.

경기도 화성시 대양이엔아이 본사. 대양이엔아이 제공.

경기도 화성시 대양이엔아이 본사. 대양이엔아이 제공.


대양이엔아이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등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휘발성 유기화합물 가스를 고온에서 산화·연소시켜 처리하는 '축열식 산화 연소장치(RTO)' 설비를 제작·판매하는 회사다. 삼성디스플레이, SK하이닉스, 현대중공업, 중국 판다전자 등 국내외 글로벌 기업에 RTO 설비를 제공하고 있다.

대양이엔아이는 설비 효율을 경쟁사보다 높게 구현하는 'Rotary Wing'이라는 독창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보안 유지를 위해 일부러 특허 출원도 하지 않고, 외주를 맡기는 대신 자체 생산만 해온 중요한 영업비밀 기술이다.


대양이엔아이에서 사장을 거쳐 부회장으로 근무하던 김 대표는 2015년 4월 퇴사한 뒤 곧바로 같은 설비를 제작·판매하는 이앤비코리아(구 동현산기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대양이엔아이에서 기술·제조·영업 관리부장, 공장장(이사), RTO 설비도면 작성 업무 담당자 등으로 일하던 나머지 공범들 역시 김 대표의 퇴사 시점을 전후해 이앤비코리아로 이직했다.

문제는 이들이 퇴사 전후로 대양이엔아이의 RTO 설비 설계도면, 원가 및 견적 산출 내역, 자동제어 시스템 계통도 등 중요한 영업비밀이 담긴 파일 수천개를 무단 반출해 자신들의 사업에 활용한 것이었다.


RTO 설비도면 작성 업무를 담당했던 서모씨가 반출한 핵심기술 관련 파일만 무려 8688개였고, 나머지 피고들 역시 적게는 수십개부터 많게는 수백개의 파일을 반출했다. 심지어 이들은 대양이엔아이의 Rotary Wing 기술을 국내와 중국에서 특허 출원하기도 했다.

대양이엔아이 측은 피고들을 업무상 배임 및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고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뒤 특허 관련 소송까지 대응해야 했다.

형사재판에서 김 대표를 제외한 4명은 최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이, 이앤비코리아는 벌금 5000만원이 확정됐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영업비밀 부정취득·사용 행위는 그 죄질이 매우 좋지 않아 엄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피고인들이 얻은 구체적인 경제적 이익 및 피해 회사의 손해액을 산정하기는 어렵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주모자라고 할 수 있는 김 대표는 이들보다 뒤늦게 기소돼 2023년 10월 1심에서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법정구속을 면해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2심 재판을 받고 있다.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대양이엔아이 사업장. 대양이엔아이 제공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대양이엔아이 사업장. 대양이엔아이 제공


영업비밀 침해의 경우 정확한 피해 액수 산정이나 입증이 쉽지 않아 실제 손해액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소액의 손해배상액 인정에 그친 사례가 많았다.

지난해 8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개정 부정경쟁방지법 14조의2 6항은 고의에 의한 영업비밀 침해행위에 대한 배상액 상한을 기존 '손해액의 3배'에서 5배로 확대했는데, 이번 사건에서 재판부는 이 같은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을 적용하지 않고도 30억원이라는 파격적인 액수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이번 판결을 통해 ▲구체적인 공모의 증거가 없어도 객관적인 공동관련성이 인정되면 공동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고, 손해배상액을 계산하면서 ▲기술을 빼돌린 회사가 피해 회사의 영업비밀을 사용함으로써 시행착오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현저히 줄일 수 있었다는 점과 ▲유출한 영업비밀 파일을 삭제했더라도 그 핵심 정보들이 기술을 빼돌린 회사의 기술 등에 '혼화돼 잔존'함으로써 지속적인 이익 창출에 기여했다는 점을 반영했다.

이번 소송에서 원고 측은 법무법인 YK와 선린, 피고 측은 법무법인 동인이 각각 대리를 맡았다.

김택형 법무법인 YK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법원의 엄중한 인식을 보여주며, 기업의 소중한 자산을 보호하고 공정한 시장 경쟁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대양이엔아이 박 대표는 "피고인들은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 한 번도 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피해 회복을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며 "9년에 걸친 길고도 힘든 소송 끝에 유죄 확정 판결이 나왔지만 피고인들 중에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고, 최소한의 사과나 반성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피고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에 오히려 더 당당하게 영업 행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낀 큰 절망감은 법치국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생기게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석진 로앤비즈 스페셜리스트 csj0404@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