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 마포구 서보미술문화공간에서 열린 재즈 피아니스트 자하리 스탬플리의 공연에서 스탬플리가 열정적으로 연주하고 있다 재즈브릿지컴퍼니 제공 |
와인잔을 손에 든 관객들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자유롭게 공연을 맞이하는 순간, 이미 공간에는 재즈의 즉흥성이 흘러넘쳤다. 16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서보미술문화공간에서 열린 재즈 피아니스트 자하리 스탬플리의 첫 내한 공연은 미술관 특유의 열린 분위기와 어우러져 관객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자하리 스탬플리는 올해 26살의 젊은 나이지만, 세계 재즈계가 주목하는 차세대 스타다. 2023년 재즈계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라 불리는 허비 행콕 재즈 컴페티션 피아노 부문 우승으로 국제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당시 허비 행콕은 그를 두고 전설의 재즈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의 재림”이라며 극찬했다. 이어 시카고 트리뷴 선정 올해의 시카고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상, 그래미 후보에 오르며 단순한 유망주가 아니라 검증된 ‘젊은 거장’임을 증명했다.
2023년 낸 첫 앨범 ‘스틸 리스닝’의 곡 ‘프렐류드 엔트런스’가 오프닝 곡으로 흘러나올 때부터 기존의 문법을 뛰어넘는 비범함이 엿보였다. 이어 ‘저니 투 마드리드’, 마이클 잭슨의 명곡 ‘휴먼 네이처’를 재해석한 연주, 그리고 최근에 낸 앨범 ‘왓 어 타임’의 수록곡들을 차례로 연주하면서 현란한 테크닉과 곡 해석력을 뽐냈다. 마치 코엔 형제의 영화처럼 벼락처럼 끝내는 곡 마무리는 관객의 박수 타이밍을 뺏으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가 건반 위에서 연주를 이어갈 때마다, 클래식, 재즈, 가스펠, 알앤비(R&B), 힙합이 자유롭게 교차하며 새로운 서사를 빚어냈다. 앙코르에서는 객석에 있던 게스트와의 즉흥 협연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스틸 리스닝’을 들려주며 90여 분의 첫 한국 여정을 완성했다.
16일 서울 마포구 서보미술문화공간에서 열린 재즈 피아니스트 자하리 스탬플리의 공연에서 스탬플리(왼쪽)가 그의 어머니 디에레니아 스탬플리(가운데), 드러머 김종국과 협연하고 있다. 재즈브릿지컴퍼니 제공 |
이날 무대의 또 다른 중심은 어머니 디에레니아 스탬플리였다. 아들보다 먼저 그래미 후보에 올랐던 멀티 연주자인 그는 베이스와 색소폰, 신시사이저를 오가며 음악을 이끌었다. 무대 중앙에서 아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거나 눈빛으로 템포를 조율하는 모습은 마치 지휘자 같았다. 자하리가 무대에서 “엄마”라고 한국어로 외치자 객석에서는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자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교감은 음악적 협업을 넘어, 세대를 잇는 재즈의 전승처럼 느껴졌다.
한국 드럼 연주자 김종국의 합류도 공연의 완성도를 배가시켰다. 스탬플리가 연주 도중 드럼으로 다가가자 김종국은 웃으며 피아노로 향했고, 둘의 역할이 바뀐 즉흥 연주 장면은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관객들은 스캣송을 따라 부르거나 박수로 리듬을 맞추며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팝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열기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16일 서울 마포구 서보미술문화공간에서 열린 재즈 피아니스트 자하리 스탬플리의 공연에서 스탬플리가 관객과 함께 즉흥 연주를 펼치고 있다. 재즈브릿지컴퍼니 제공 |
16일 서울 마포구 서보미술문화공간에서 열린 재즈 피아니스트 자하리 스탬플리의 공연에서 스탬플리(왼쪽)가 그의 어머니 디에레니아 스탬플리와 협연하고 있다. 재즈브릿지컴퍼니 제공 |
스탬플리의 연주는 패기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건반 위에서 끊임없이 실험을 이어갔으며, 관객을 공연의 주체로 끌어들이는 그의 태도는 재즈가 살아 있는 대화의 예술임을 증명했다. “다시 만나요”라는 외침으로 공연을 마무리할 때, 관객들은 모두 기립해 그와 함께한 재즈의 순간을 나눴다.
건반 위에서 그림을 그리듯 사운드를 펼쳐낸 스탬플리는 단지 천재 신예가 아니라 21세기 재즈의 새로운 언어를 쓰는 스토리텔러였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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