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택 '환향'(1981) 국립현대미술관 |
한국 사회에서 환향(還鄕)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물리적 이동만 뜻하지 않는다.
식민지배, 전쟁, 급격한 도시화가 뒤엉켰던 숨 가쁜 역사 속에서 고향 상실의 경험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귀향은 삶의 근거지로 돌아가 가족과의 유대를 회복하고, 심지어 참화와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균형과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층 4관에 전시된 전선태 화백의 대표작 '환향'(1981)은 그 감정을 한 폭의 캔버스에 압축적으로 전개한 작품이다. 백발 노부부를 비롯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귀향 직후 서로 부둥켜안고 침묵 속에서 우는 장면은, 이산과 분단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실향민들의 '회귀 정서'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올해 광복 80주년을 추념하며 '고향'의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 '향수, 고향을 그리다'를 개최한다.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캔버스에 울분과 그리움의 마음을 붓으로 토해냈던 화가 75인의 작품 20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정든 고향을 상실했고, 잃은 고향을 되찾았지만, 다시 이념 갈등으로 쪼개진 뒤 폐허를 경험했다가 어느덧 돌아가지 못하는 장소가 돼버린 고향을 비극의 20세기사 속에서 응시하는 귀한 전시다.
천정 이상범의 '귀로'(1937)와 광복 당일에 그려졌다고 알려진 '효천귀로'(1945)는 먼저 주목을 요한다. 전시실에서 서로 마주 보듯 배치된 이들 작품은 고향의 두 이미지를 대비시킨다. 둘 다 산수 풍경화이고, 소를 몰고 가는 촌부가 똑같이 등장하는데,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귀로'는 늦가을 저녁 운무에 감싸인 원경의 산을 그렸고, '효천귀로'는 새벽 안개를 그려서다. '귀로'가 돌아가지 못하는, 잃어버린 장소로서의 목가적 고향을 그린 느낌인 반면, '효천귀로'는 '새벽녘의 시냇물(효천·曉川)'이란 제목에서 보듯 다시 시작해야 하는 여명 속의 고향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참작한다면 천정의 그림이 의미하는 바는 새로워진다.
오지호 '동북산촌'(1928) 리움미술관 |
한국적 인상주의를 확립한 오지호의 '동북산촌'(1928), 버드나무 아래 뱃놀이하는 모습을 담은 이인성의 '무제'(1930~1940년대), 논밭 사이로 소쿠리를 이고 가는 여인을 담은 김정현의 '풍경'(1940년대)도 그리운 고향에 가닿게 만드는 힘이 육중하다.
되찾았던 땅은 머지않아 피로 물들었고, 곳곳이 폐허로 변했다. 전쟁의 상처와 피란의 혼란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기억을 더 생생히 부각한다. 윤중식의 '봄'(1975)은 그래서 특히 눈길이 간다.
달빛이 비치는 밤, 커다란 나뭇가지에 앉은 두 마리의 비둘기는 기억에만 존재하는 고향을 자유롭게 오가는 자연을 담아냈다. 이 그림은 불타는 고향을 떠나는 피난길, 즐비한 시체 옆에서 검문을 당하던 모습을 그린 윤중식의 '전쟁 드로잉'(1951)과 대조를 이루도록 배치됐다. 피란 도중에 아내와 큰딸을 잃고 젖먹이 막내딸마저 영양실조로 잃었던 화가의 서늘한 개인사는 고향을 향한 애틋함을 강화한다.
망향(望鄕)으로서의 고향은 신석필의 '강변의 가족들'(1959)에서도 두드러진다. 황해도 출신으로 전쟁 당시 남하한 화가는 헤어진 가족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통해 실향의 아픔을 극대화했다. 그 옆으로 물이 가득 담긴 정화수 한 그릇을 무심히 그린 '기원'(1976)은 그 마음을 짐작게 한다. 고향에 남겨진 가족의 안녕과 영원한 무탈을 빌었을 수많은 사람의 맑은 간절함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번 전시는 회화뿐만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수많은 문인의 시와 문장이 다수 포함돼 그림과 문장이 서로 어우러진다. 백석의 '북방에서'가 실린 '문장' 2권 6호(1940), 정지용의 '고향'이 실린 '동방평론' 1권 3호(1932),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실린 '개벽' 70호(1926) 등이 원본으로 전시된다.
아울러 중세 신학자 빅토르 위고,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생전에 남긴 고향에 대한 문장들이 두루 인용돼 깊은 사유를 이끌어낸다. '고향은 하나의 힘이며 신비이다. 고향으로부터의 이탈은 한 막의 신화적 고별이다. 귀향은 걷잡을 수 없는 환희를 방랑자에게 퍼붓는 축제이다.'(횔덜린)
전시는 오는 11월 9일까지.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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