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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안 좋아하면 어때, 그저 더 사랑하는 수밖에…

조선일보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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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안 좋아하면 어때, 그저 더 사랑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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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장편 낸 소설가 이기호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을 펴낸 소설가 이기호. /박성원 기자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을 펴낸 소설가 이기호. /박성원 기자


평범하고 지질한 이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맛깔나게 쓰는 소설가 이기호(53). 그가 개 이야기로 돌아왔다. 500쪽 넘는 두툼한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문학동네) 얘기다. 장편 기준으론 11년 만이다. 책은 비숑 프리제 ‘이시봉’을 둘러싼 인간 군상을 비추며 서울과 광주, 프랑스 파리에서 18세기 스페인까지 종횡무진한다. 광주광역시에 거주 중인 소설가가 최근 조선일보사를 찾았다.

이시봉에겐 역사가 있다. 시봉은 2004년 이기호의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의 여러 단편에 등장했고, 2009년 작 장편 ‘사과는 잘해요’에도 나왔다. 학창 시절 본드를 맡다 교도소를 들락거린 적이 있는 연극 배우, PC방 아르바이트생에게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내라고 종용하는 불량배, 복지 시설에서 학대받다 얼떨결에 사회로 나온 약간 모자라는 듯한 청년 등으로.

이기호는 “끝에 이응(ㅇ) 자가 들어가는 이름에 애정이 간다”며 “내게 이시봉은 비루하고 약한 존재의 통칭”이라고 했다. 이에 기자가 “윤회 관점에서 보면 축생(畜生)이다. 전작에서 업 때문에 개로 태어난 것인가” 묻자 “와하하” 큰 웃음이 터졌다. “아~거기까진 생각 못 했습니다. 앞으론 그렇게 말할게요. 그런데 사랑스러운 강아지로 태어났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작가는 자신의 반려견도 이시봉이라고 이름 지었다.

소설가 이기호와 그의 반려견 이시봉(오른쪽 휴대전화 속 사진). 소설 속 이시봉과는 다른 개지만, 소설의 결말부를 바꿀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래 구상할 때 이시봉은 죽었는데, 그 부분에서 1년 동안 한 문장도 못 쓰겠더라고요.” /박성원 기자

소설가 이기호와 그의 반려견 이시봉(오른쪽 휴대전화 속 사진). 소설 속 이시봉과는 다른 개지만, 소설의 결말부를 바꿀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래 구상할 때 이시봉은 죽었는데, 그 부분에서 1년 동안 한 문장도 못 쓰겠더라고요.” /박성원 기자


2018년 소설집 ‘누구에게나 다정한 교회 오빠 강민호’로 본지 주관 동인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얼마 뒤 아내와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 결혼 10년 만에 간 신혼여행이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스페인 화가 고야의 그림 속 비숑을 봤다. 비숑 이시봉을 반려견으로 막 들였을 때다. 이기호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왔듯 분명히 우리나라에도 저 품종견을 들여온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며 “내 안의 이야기들과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결합한 결과물”이라고 했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죽자 주인공 이시습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힌다. 20대 은둔 청년이 하는 일이라곤 술 마시는 것과 시봉을 먹이고, 씻기고, 산책시키는 것뿐. 그러나 시습이 시봉에게 주는 헌신과 애정에는 조건이 없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것(125쪽)”이라는 소설 속 문장처럼, 시습은 온갖 난장판을 묵묵히 버틴다. 사랑 없인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시봉이 희귀종 ‘후에스카르고 비숑 프리제(작가가 스페인 노래를 듣다 지어낸 품종명)’라며 접근해오는 인물 정채민이 보이는 비틀린 애정과 대비된다.

알고 보니 견주의 짝사랑이 낳은 소설이다. 마치 소설 속 이시습처럼, 소설가 이기호도 현실 세계의 이시봉 돌봄을 전담한다. 그런데도 아내와 세 아이 다음 순위, 즉 서열 꼴찌다. “난 얘를 사랑하는데, 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내 사랑을 알아주지도 못하는 존재를, 얼마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작가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설령 그 존재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존재를 더 사랑하는 것이겠구나.”


소설을 읽다 왕왕 먹먹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정채민 대표에게 납치되다시피 한 이시봉과 간신히 다시 만난 이시습은 충격에 빠진다. 한 치 오차 없이 둥글게 자른 머리, 복슬복슬 반원 모양으로 다듬은 꼬리….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더 행복한 듯한 반려견 모습에 상처 받지만, 시습은 고생 끝에 시봉을 도로 데려온다. 물론 그가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저 시봉을 더 사랑하는 일뿐이다.

500쪽 넘는 소설은 줄이고 줄인 것. 그는 “말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든다”며 남다른 포부를 밝혔다. “여건만 된다면 대하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출판사에서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박경리·조정래 선생님 시대엔 여건이 됐지만, 지금은 로또가 돼야 가능할 것 같은데….” 그가 씩 웃었다. 로또 1등 확률은 약 800만분의 1. 한국 문학 독자들은 이번 생에 이기호의 대하소설에 당첨될 수 있을까. 우리의 운을 믿어보자.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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