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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건설현장에 갇힌 北노동자들…"노예처럼 일했다"

이데일리 방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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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건설현장에 갇힌 北노동자들…"노예처럼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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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러시아서 강제노동하다 탈출한 北주민들 인터뷰
휴식 없이 매일 18시간 일하고 감시·폭력 시달려
임금 대부분 北에 귀속…탈출 결심 결정적 계기
北, 인력 통제·감시 강화…"추가 파견 염두 둔 듯"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주민들은 노예와 같은 환경에서 일했다. 건설 현장에 갇혀 하루에 18시간 이상 일하며 밤낮으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의 감시를 받았다. 또 벌레가 들끓는 지저분하고 비좁은 컨테이너 숙소에서 지내거나, 문틀에 비닐포를 걸어 추위를 막은 미완공 아파트 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

영국 BBC방송은 1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를 탈출한 6명의 북한 노동자들, 한국 정부 관계자, 노동자들을 구출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 전문가 등을 취재한 뒤 이같이 보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AFP)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AFP)




러시아 인력난에 北주민 대규모 건설 현장 투입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병력 부족뿐 아니라 대규모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그나마 남아 있는 노동력은 포탄·미사일 제작 등에 동원됐고, 건설 현장 등 다른 부문에서 부족해진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러시아는 북한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러시아로 이주해 다양한 노동 현장에 투입됐다.

북한은 2019년 유엔의 대북제재로 자국 노동자의 해외 파견이 공식 금지됐다. 하지만 유학생 비자 등으로 제재를 우회해 러시아로 인력을 들이고 있다. 러시아 정부 통계에 따르면 작년에 러시아로 파견된 북한 노동자는 1만 3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년대비 12배 급증한 규모다.

올해는 더 많은 노동자가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며, 일각에선 5만명 이상이 추가 파견될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러시아의 고위 관리인 세르게이 쇼이구는 지난 6월 처음으로 5000명의 북한군을 쿠르스크 재건에 파견할 것이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쿠르스크는 지난해 우크라이나군이 점령했다가 이후 러시아군에 밀려난 지역이다.

한국 정보당국 관계자는 “러시아 병사들 상당수가 전장에 묶여있고 전사자와 탈영자까지 속출하면서 모스크바는 점점 더 북한 노동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대 교수이자 북러 관계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도 “북한 노동자들은 러시아에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인건비가 저렴하고, 근면하며, (러시아가) 곤경에 처할 일도 없다”고 짚었다.

휴식 없이 매일 18시간 일하고 감시·구타 시달려

러시아 노동 현장에서 탈출한 노동자 중 한 명인 진씨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러시아 극동 지역에 도착했을 때 북한 보안 요원에 의해 공항에서 공사 현장으로 곧바로 이동했다. 당시 요원은 ‘외부 세계는 우리의 적’이라며 누구와도 말을 섞지 말고 아무 것도 보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진씨를 제외한 나머지 5명도 “아침 6시에 일어나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고층 아파트를 지어야 했으며, 1년에 단 이틀만 쉴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공포를 느꼈고, 마치 감옥 창살이 없는 수용소와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태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같은 날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끔찍했다”며 매일같이 손이 굳어 펴지지 않을 정도로 혹사를 당했다고 회상했다. 찬씨도 “어떤 사람들은 낮잠을 자려고 (몰래) 자리를 비우거나 서서 잠들곤 했다. 감독관들이 그들을 발견하면 구타했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고 거들었다.

남씨는 “한 번은 4미터 아래로 떨어져 얼굴이 심하게 다쳐 일을 할 수 없게 된 적이 있었다. 병원에 가려 했는데 감독관들은 현장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임금 대부분 北에 귀속…탈출 결심 결정적 계기

이들은 담배와 술, 일당을 모아 구입한 중고 스마트폰을 통해 탈북자들의 소식을 처음 접했으며, 한국 구조활동가 등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전했다.


태씨는 “다른 나라 노동자는 3배 적게 일하면서 5배의 임금을 받았다.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며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이 얼마인지 보여주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느날 밤 짐을 쓰레기 봉투에 싸고 침대 시트 아래 담요를 쑤셔 넣어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뒤 공사 현장을 몰래 빠져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수천킬로미터를 달려 서울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준 변호사를 만났다”며 탈출 과정을 소개했다.

진씨는 “다른 노동자들이 우리들을 노예라고 부르던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발끈한다. 우리보고 사람이 아니라 말할 줄 아는 기계일 뿐이라며 조롱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이어 “어느 날 관리자가 북한 당국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귀국해도 돈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그때 목숨을 걸고 탈출하기로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2021년 3월 북한 평양 송신-송화 지역 1만가구 규모 아파트 개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의 모습.  (사진=AFP)

2021년 3월 북한 평양 송신-송화 지역 1만가구 규모 아파트 개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의 모습. (사진=AFP)




北, 인력 통제·감시 강화…“추가 파견 염두 둔 듯”

북한은 오래 전부터 해외 인력 파견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대부분은 김정은 정권 유지 및 핵무기 개발 등에 쓰였다. 북한 당국은 해외 파견을 ‘특권’으로 포장하고, 성인 남성만을 대상으로 철저한 충성심 검증을 거쳐 인력을 선별한다.

이들 노동자는 월 100~200달러 수준의 임금만 장부상 기록되며, 그마저도 귀국 전까지는 받을 수 없다. 대부분의 수입은 ‘충성 자금’ 명목으로 북한 정부에 귀속된다.

이에 러시아로 파견됐다가 탈출하는 경우가 증가했고, 북한 당국은 이를 막기 위해 최근 사상교육, 자아비판 등 통제를 강화하고 외출도 제한했다. 평소 2명씩 짝지어 외출하던 관행도 5명 단위로 확대해 감시 강도를 높였다. 이에 러시아에서 탈출해 한국으로 입국하는 탈북민은 연간 20명에서 10명으로 반토막났다.

란코프 교수는 북한 당국의 통제 강화에 대해 “앞으로 더 많은 노동자들이 러시아로 유입되는 것에 대비한 조치일 가능성이 크다”며 “북한 노동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군인과 무기 배치가 중단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러시아로 계속 파견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