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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잭슨 폴록' 흑인 게이 작가, 서울 한복판서 개인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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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잭슨 폴록' 흑인 게이 작가, 서울 한복판서 개인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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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마크 브래드포드 국내 첫 개인전
파마 종이·전단지 활용 '사회적 추상'
인종, 젠더, 계층 등 불평등 비판 작업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 미국 추상화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작품이 설치돼 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 미국 추상화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작품이 설치돼 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전시장 천장에 시커먼 지구 8개가 매달렸다. 서로 다른 크기의 구는 우리가 하나의 지구에 살고 있지만 불공평한 환경에 따라 각자가 직면한 세상은 불균형하고 고립돼 있음을 암시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하층민 출신인 흑인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64)의 국내 첫 개인전에 등장한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2019)는 권력욕이 가져온 생태 위기와 사회의 파괴를 표현한다. 작품명은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대사에서 따왔다. 그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억압과 차별, 불평등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대표작 등 40여 점을 선보이는 개인전 '킵 워킹(Keep Walking)'이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지난 1일 개막했다.

미국 추상회화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가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미국 추상회화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가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브래드포드는 1961년 LA 유색인종들이 모여 사는 사우스센트럴의 편모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91년 서른 살에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 들어가 늦깎이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인종, 계층, 젠더 등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며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가로 성장했다.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됐고, 2021년에는 미 주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도 뽑혔다. 2018년 그의 작품 '헬터 스켈터 Ⅰ'이 영국 런던 경매에서 870만 파운드(약 160억4,500만 원)에 판매돼 생존 흑인 작가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마크 브래드포드가 한국 전시를 위해 준비한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 설치 모습.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마크 브래드포드가 한국 전시를 위해 준비한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 설치 모습.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 잭슨 폴록(1912~1956)에 비견되는 그의 작업은 '사회적 추상화'라 불린다. 그는 무거운 주제들을 일상의 재료로 풀어낸다. 어머니 미용실에서 늘 봤던 파마용 반투명 종이(엔드페이퍼), 전화번호부, 전단지, 벽보 등을 캔버스에 겹겹이 붙인 후 덧칠하고 찢어내고 잘라내고 긁는다. 그 표면에 끈과 철사, 로프 등을 더한다.

가령 이번 전시를 여는 '떠오르다(Float)'(2019)는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 광고 포스터, 신문지 등을 긴 띠의 형태로 만들어 노끈으로 이어 붙여 전시장 바닥(약 600㎡)을 뒤덮는다. 관람객은 작품을 밟고 지나가며 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크 브래드포드의 '떠오르다(Float)'.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마크 브래드포드의 '떠오르다(Float)'.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마크 브래드포드의 연작 '엔드페이퍼' 중 '파랑'. 파마용 반투명 종이의 가장자리를 토치로 태워 검게 그을린 테두리를 격자 구조로 캔버스 위에 이어 붙였다. 지도 형식으로 결합해 거리 위에 새겨진 구조적 불평등을 의미한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마크 브래드포드의 연작 '엔드페이퍼' 중 '파랑'. 파마용 반투명 종이의 가장자리를 토치로 태워 검게 그을린 테두리를 격자 구조로 캔버스 위에 이어 붙였다. 지도 형식으로 결합해 거리 위에 새겨진 구조적 불평등을 의미한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폭풍이 몰려온다'는 전시장을 검은 벽지로 두르고, 종이 표면을 산화시켜 만든 금빛 무늬가 벽지 위로 요동친다. 이를 배경으로 미국 최초의 드래그퀸(예술이나 오락·유희를 위해 여장을 하는 남성 동성애자)인 윌리엄 도어시 스완(1858~1925)의 형상이 드러나는 작품을 걸었다. 작가는 2005년 미국 남부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피해를 입은 흑인 사회와 재해와도 같은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려 했던 역사적 인물을 병치시켰다.

마크 브래드포드가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마크 브래드포드가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전시를 앞두고 한국을 찾은 작가는 "내가 겪은 경험을 나와 분리하거나 삭제하는 대신 작업을 통해 여성 혹은 성소수자들이 처하는 불평등과 같은 일들이 모두 권력과 관계돼 있고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인종과 젠더를 도외시하는 한국에서 자신을 거리낌없이 내보인 그의 개인전 자체가 도전으로 읽힌다.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