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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팩트의 펀치가 선전 예술보다 아프다

조선일보 이일규 前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정치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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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팩트의 펀치가 선전 예술보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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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혁 "'장한석' 동의 어려워…연대는 시기상조"
北 드라마 ‘백학벌의 새봄’
부패와 애정 표현 담으며
달라진 선전 전술 보여줘

김정은 세습정치는 불변
K컬처와 정보 유입시켜
주민들 인식 변화 이끌어야
북한에서 최근 종영한 드라마 '백학벌의 새봄' 속 연인. 북한 사회의 부패와 가족 갈등을 비교적 솔직하게 묘사해 인기를 끈 것은 김정은 정권의 달라진 프로파간다 전략을 보여준다. /조선중앙TV 연합뉴스

북한에서 최근 종영한 드라마 '백학벌의 새봄' 속 연인. 북한 사회의 부패와 가족 갈등을 비교적 솔직하게 묘사해 인기를 끈 것은 김정은 정권의 달라진 프로파간다 전략을 보여준다. /조선중앙TV 연합뉴스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정리한 이후 김정은은 ‘통일 지우기 정책’과 ‘한국 무시 전략’을 견지하고 있다. 얼마 전 우리 정부가 유엔사를 통해 표류 선원 6명 송환을 통보했지만 북한은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 북한 공식 매체들에선 ‘괴뢰’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한국’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다. 동포 개념을 지우고 완벽한 두 국가로 가겠다는 의지의 방증이다.

김정은이 처음부터 김일성·김정일 스타일의 ‘쇄국 정치’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 유학하고 후계자 수업 중 군 복무도 한 그에게는 선대와 달리 국제사회 흐름에 대한 감각과 그 나름대로 고생한 경험이 있었다. 김정은은 여러 방식으로 북한 사회 변화를 시도했다. 그중 하나가 2010년대 중후반에 직접 발안하고 추진한 ‘2차 영화 혁명’이다. 1967년 김정일이 노동당 선전선동부 영화과장에 임명된 후 1970년대 북한 영화계를 진흥한 게 1차 영화 혁명이라면, 김정은의 2차 영화 혁명은 북한 주민들 사이의 한류 열풍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확산된 한류 열풍은 북한 주민들의 머릿속에 한국에 대한 동경을 길러내고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지웠다. 당황한 북한은 2002년 당·사법기관을 망라한 ‘109연합지휘부’를 창설해 한류와 외부 정보 유입을 엄격히 단속했다. ‘109상무’가 수색 영장도 없이 가택을 기습·수색하는 일이 예사였다. 수많은 사람이 당적, 법적 제재를 받았다.

영국 왕립예술학교 출신 김황이 만든 동영상 '모두를 위한 피자'의 한 장면. 탈북자 10명의 도움과 감수를 받아 사투리·의상·소품·서체 등이 북한산처럼 보이는 DVD 500장을 만들어 중국을 통해 평양 암시장에서 이 풀었고, 1개월 뒤부터 피자를 만들어 먹은 북한 주민들로부터 피드백(사진·영상·편지)을 받았다.

영국 왕립예술학교 출신 김황이 만든 동영상 '모두를 위한 피자'의 한 장면. 탈북자 10명의 도움과 감수를 받아 사투리·의상·소품·서체 등이 북한산처럼 보이는 DVD 500장을 만들어 중국을 통해 평양 암시장에서 이 풀었고, 1개월 뒤부터 피자를 만들어 먹은 북한 주민들로부터 피드백(사진·영상·편지)을 받았다.


2014년 5월 김정은은 9차 전국예술인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시대와 사회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한 영화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2018년 초 김정은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영화과와 영화 예술 부문 관계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 영화가 20년 이상 후퇴했다. 변변한 영화가 없으니 인민들, 특히 청년들이 미국과 남조선 영화를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강도가 있고 간부들 중에는 부패한 사람이 많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영화를 만들면 인민들이 미국이나 남조선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물리적 통제만 생각하지 말고 더 좋은 영화를 제작·보급해 우리 것을 선호하게 하라.”

김정은의 지시 집행을 위해 당 선전선동부는 영화·예술계 작가, 연출가(감독), 배우 100여 명을 문수초대소에 모아 놓고 매일 미국과 한국 영화를 보여주었다. 오전과 오후에 1편씩 보여준 후 소감을 적어내게 했다. 처음에는 다들 좋아했지만 매일 적어내는 ‘감상문’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느낀 대로 쓸 수 없고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2주간의 영화 시청이 끝난 후 시범 영화 3편이 만들어졌다. 그중 내가 알고 있는 한 편은 이런 내용이다. 젊은 커플이 관광하러 마식령 스키장으로 가던 중 강도를 만나 여자가 납치된다. 납치범들은 여자를 인질로 잡은 후 애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는 보안서(경찰)에 신고한 후 보안원들과 함께 간난신고 끝에 애인 구출에 성공한다.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만든 영화지만 그동안 북한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납치·강간·액션·키스 장면이 잔뜩 나온다. 그런데 그 시범 영화 3편을 본 김정은은 “이런 영화를 주민들에게 보여주면 큰일 나겠다”며 방영을 불허했다.


당 선전선동부는 그 후 꾸준히 변화를 모색했다. 최근 나온 북한 드라마 ‘한 검찰 일군의 수기’ ‘백학벌의 새봄’ 등에서는 북한의 약점을 어느 정도 드러내면서도 당이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통해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스킨십과 애정 표현도 대담하게 담았다. 조선중앙TV에 따르면 시청률도 매우 높다고 한다.

김정은의 시도에는 일련의 시사점이 있다. 주민 계몽과 체제 선전 목적이 강한 북한 예술 작품이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김정은이 추구하는 변화는 자유, 민주주의 등 북한 주민이 바라는 진정한 변화와는 거리가 멀다. 국제사회를 의식하며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어떤 것도 세습 정치의 문턱을 넘지는 못하고 있다. 공포 정치만으로는 세습 체제를 유지할 수 없고, 변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는 상황 판단에 따른 통치 전술일 뿐이다.

북한 주민이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하려면, 막연하게 김정은의 변화 의지에만 기댈 수 없다. 한국의 영화·드라마·음악 등 K컬처와 외부 정보를 지속적으로 유입시켜 북한 주민의 인식 변화를 이끄는 일이 절실하다. 팩트(사실)의 펀치력이 선전 예술(허구)보다 훨씬 강하고 아픈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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