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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축구 큰★ 또 지다...펠레, 보비 찰튼 이어 베켄바워까지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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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1974 서독월드컵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서독팀 주장 프란츠 베컨바워. 뮌헨|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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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켄바워와 서독월드컵 우승 멤버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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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김경무 전문기자] 바이에른 뮌헨과 독일의 축구 레전드 프란츠 베켄바워가 8일(현지시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전세계가 깊은 애도의 물결에 휩싸였다.

지난 2022년 12월 브라질의 펠레, 그리고 지난해 11월 잉글랜드의 보비 찰튼에 이어 20세기를 화려하게 빛낸 독일의 별이 서거하면서 지구촌 축구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독일 dpa통신은 이날 가족들이 성명을 통해 베켄바워의 사망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남편과 아버지 프란츠 베켄바워가 어제 일요일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잠을 자다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게 돼 깊은 슬픔을 느낀다. 침묵 속에서 슬퍼하고, 어떤 질문도 삼가해주기를 부탁드린다.”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베켄바워는 선수, 감독, 행정가로서 독일 축구에 빛나는 족적을 남겼다. 특히 경기장에서 우아한 플레이와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줘 ‘카이저’라는 별칭이 붙었다.

1958년과 1962년, 1970년 3차례 브라질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펠레한테 붙여진 킹(King)이라는 별칭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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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서독월드컵 결승전 당시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워(오른쪽)와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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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를 앞세운 독일이 1974 서독월드컵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포진한 ‘토털 사커’의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우승한 것은 그의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펠레조차도 “내가 본 최고 선수 중 한명”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수비 라인 뒤에서 경기 페이스를 조절하며 자유롭게 움직임이는 ‘리베로’ 역할을 정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2년과 1976년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2000년에는 독일의 ‘세기의 축구선수’로 선정됐다.

1965년 9월부터 1977년 2월까지 독일 국가대표로 103경기에 출전해 독일 축구 ‘황금세대’를 이끌었고, 197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트로피도 들어올렸다.

최근 타계한 브라질의 마리오 자갈로, 프랑스의 디디에 데샹과 함께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에서 우승한 3명 중 한 명이다.

독일 클럽 레벨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함부르크에서 유러피언컵 3회, 유러피언컵 위너스컵 1회, 분데스리가 5회, 독일컵 4회 우승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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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와 베켄바워의 다정했던 한때.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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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뮌헨은 성명을 통해 “FC바이에른의 세계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 갑자기 더 어두워졌고, 조용해졌고, 더 빈곤해졌다. 독일의 기록 챔피언들은 프란츠 베켄바워, 독특한 ‘카이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으며, 그가 없었다면 바이에른은 오늘날의 클럽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고 했다.

베켄바워는 독일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두차례 월드컵 결승에 진출했고,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결승에서는 아르헨티나를 1-0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당시 우승 멤버인 루디 푈러는 “프란츠 베켄바워를 알고 경험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특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의 뛰어난 코칭 퍼포먼스가 없었다면 우승은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고 돌아봤다. kkm100@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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