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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한결같은 안성기도 “10대 때는 발랑 까진 아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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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에 만난 국민배우

스크린 안팎 충무로 버팀목 역할

아시아나단편영화제 17년 함께해

“독립·작가영화에 힘 실어줘야”

중앙일보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개막식에서 안성기 집행위원장(가운데)이 후배 배우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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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 극장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이하 아시아나영화제) 개막식에서 진귀한 광경이 펼쳐졌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뮤지션 디폴이 고전영화 ‘하녀’(1960) 영상을 리믹스한 공연이 열렸다. 스크린 속 눈이 뎅그런 당시 여덟 살 아역배우 안성기를 예순일곱이 된 그가 객석에서 마주했다. “형님, 기억나세요?” 개막 사회를 맡은 후배 배우 박중훈의 너스레에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 영화사 가운데 자그마치 63년. ‘국민배우’ 안성기가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한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올해도 여름 대작 ‘사자’에서 까마득한 후배 박서준과 퇴마 사제로 호흡 맞췄다.

“한결같이 살자”는 좌우명답게 충무로 대소사도 꾸준히 챙겨왔다. 올해 17회를 맞은 아시아나영화제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은 지도 15년째. 2003년 아시아나항공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단편영화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영화제다. 최근 아시아나항공이 매각 초읽기에 들어가며 영화제도 향방을 모색하는 상황. 5일 폐막식에 앞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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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녀’ 속 아역 시절 안성기.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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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가 처음 출범한 2003년은 그가 주연한 영화 ‘실미도’(감독 강우석)로 한국영화 최초 1000만 관객을 기록한 해다. 그는 “그해 1회, 이듬해 2회 땐 집행위원장이 아닌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했다”고 돌이켰다. “배우로서 영화 촬영이 우선이지만, 나머지 시간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유니세프(1991년부터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활동 중)나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일도 그 연장 선상이죠. 내가 돕는다지만 느낀 게 많아요. 오히려 내가 도움받았죠.”

“초기엔 세계 단편과 우리네 단편 격차가 심했는데 지금은 거의 대등한 수준”이라는 그는 “이 영화제의 큰 역할은 한국영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좌표를 보여준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은 올해의 개막공연은 그에게 더욱 각별했다. “다섯 살 때 연기를 시작하고부터 필름 속에서 살아왔다”는 그에겐 삶이 곧 영화였고 영화가 곧 삶이었다. 1957년 데뷔작 ‘황혼열차’ 이후 아역 시절 출연작만 70여 편. 연기자의 길로 이끈 이가 올해 1월 작고한 아버지 안화영씨였다. “아버님이 원래 체육인이신데, 서른 전후에 배우를 꿈꿨어요. ‘황혼열차’에도 아버지가 잠깐 나오는데, 아역이 필요하대서 저를 데려간 것이었죠.”

전후 부랑아들을 다룬 김기영 감독의 ‘10대의 반항’(1959)으론 미국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도 받았다. 한국 최초 해외 영화제 연기자 수상 기록이다. 중학교 3학년 땐 연극 ‘잉여인간’으로 이순재·김성옥·장민호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국립극장 무대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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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열차’에 함께 나온 아버지 안화영씨 모습.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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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어떤 10대였나.

A : “발랑 까진 아이였다. 어른들하고 어울리며 배운 말을 쓰다 보니. 촬영하다 잠들지 말라고 화투장 쥐여주면 패 돌리고.(웃음) 고등학교 가서 뒤늦게 사춘기를 치렀다. ‘젊은 느티나무’(1968) 하고선 10대 역할이 많지 않아 자연히 그만뒀는데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부담스러웠다. 성격도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갔고 학군단(ROTC) 출신으로 군대를 마쳤다. 잠시 사회생활도 했다. 그는 “어릴 적 휩쓸려 살았던 명성 따윈 잊고 순수한 나로 돌아갔던 시간”이라며 “그 시절이 없었으면 80년대 내가 맡은 소시민적 역할을 잘 소화하지 못했을 것”이라 회고했다.

성인 배우로 다시 나선 70년대 말엔 엄혹한 시대가 찾아왔다. “유신이 딱 오고 나니까 검열이 강화됐죠. 반공·새마을운동영화, 순수문예영화, 호스티스 영화가 즐비하다 보니까 영화 하는 사람들은 예술가 아니다, 이상한 사람이란 인식이 생겼어요. 힘들었죠. 나는 평생 연기를 할 텐데.”

변화의 신호탄이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 붕괴 후 광주 비극이 있었던 80년, 어수룩한 청년 덕배 역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안았다. ‘꼬방동네 사람들’(1982) ‘만다라’(1981) ‘칠수와 만수’(1988) 등 “의식 있고 시대적 고민을 담은 작품”을 부러 택했다. 그런 의지가 ‘화려한 휴가’(2007) ‘부러진 화살’(2012) 등 지금껏 이어졌다.

그는 1998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국내 여러 영화제에서 신인 발굴에 힘을 보태왔다. 한국영화에 대한 조언을 청하자, 그는 “걱정 없다”고 답했다. “한국영화는 본능적으로 길을 잘 찾아갑니다. 우리 영화의 힘이죠. 상업영화는 큰 걱정 없고, 여기에 독립영화, 작가 정신이 살아있는 분위기를 계속 만들어줘야죠. 공존해서 같이 잘 갈 수 있도록 말이죠.” 한류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7일 경기대 수원캠퍼스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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