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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평양→말레이→서울… 봉화 올리듯 '릴레이 문자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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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상]

29년만의 南北 평양월드컵 축구, FIFA 회장 앞에서 무관중 경기

축구팬, 희한한 다단계 문자중계에 "차라리 파발마가 빠르겠다"

北, 패할까봐 부담 느낀듯… 경기영상은 DVD 만들어 주기로

생중계와 국내 취재진·응원단 방북을 불허한 북한 축구가 마지막으로 꺼내 든 카드는 무관중 경기였다.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한국-북한전 킥오프 휘슬이 울린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엔 적막이 흘렀다. 당초 2년 전 여자 아시안컵 예선 때처럼 북한 관중이 일사불란한 응원으로 원정팀 한국의 기를 눌러놓을 것이란 예상이 많았지만, 두 팀 선수들은 관중 없이 경기를 치렀다. 생중계가 되지 않고 원정 응원단이 없다는 이유로 영국 BBC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더비"라고 칭한 이 경기는 홈 관중까지 사라지며 더욱 괴이한 풍경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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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이 등번호만 달고 뛰었다 - 한국과 북한의 2022 카타르월드컵 2차 예선이 열린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의 원정팀 라커룸(왼쪽). 한국의 흰색 유니폼이 걸려 있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예선의 경우 유니폼에 이름을 넣지 않아도 돼서 번호만 새긴 것"이라고 했다. 오른쪽은 이날 경기장에 태극기가 게양된 모습. /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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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 김세인 홍보팀장은 "전날 저녁에 열린 매니저 미팅 때만 해도 북한 측이 예상 관중을 4만명이라 얘기했다. 우리 측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무관중 경기"라고 밝혔다. AFC(아시아축구연맹) 관계자도 "의외다. 사전에 조율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관중석엔 대사관 직원으로 보이는 외국인 몇 명만 보일 뿐이었다. 외국인 관광객도 이날 경기장에 들어오지 못했다. 몇몇 북한 전문 여행사가 이번 한국―북한전 관람을 포함한 평양 관광 패키지 상품을 내놓았다가 최근 경기 관람을 다른 일정으로 대체하거나 아예 상품 자체를 취소했다.

AP 평양 지국 취재진을 포함해 외국 기자들도 경기장에 입장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극소수 관중 중엔 인공기 핀을 가슴에 단 잔니 인판티노 FIFA(국제축구연맹) 회장이 있었다. 베이징을 경유해 1박 2일로 평양에 온 한국 대표팀과 달리 인판티노 회장은 이날 전세기를 타고 북한 측의 환대 속에 입국했다. 인판티노 회장은 최근 2023 여자월드컵 남북 공동 개최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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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무관중 경기를 펼친 것에 대해 안방인 김일성경기장에서 한국에 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태영호 전 북한 공사는 유튜브 영상을 통해 "북한은 경기에 패하게 되면 수령의 권위와 위대성을 지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며 "남북 축구 경기 소식은 언론에 보도하지 않으면서 13일 자 노동신문을 통해 평양에서 열리는 아시아 청년력기(역도)선수권만 보도한 것을 봐도 이번 경기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평양시체육단에서 활약한 탈북민 A씨는 "북한이 한국을 홀대한 것으로 보인다"며 "남북 관계가 냉랭한 상황에서 한국을 무시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관중을 부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생중계가 무산되면서 국내 축구 팬들은 FIFA와 AFC 홈페이지 문자 중계나 대한축구협회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에 의존했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엔 "무슨 목성이나 화성으로 축구를 하러 간 것 같다" "봉화나 전서구, 파발마라도 써야 하나" "동네 조기 축구도 드론으로 촬영하는 시대에 문자 중계가 웬 말이냐" 등 뿔난 팬들의 아우성이 빗발쳤다.

대한축구협회의 문자 중계는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 평양 현지에 있는 키르기스스탄 국적의 AFC 감독관이 휴대전화 메신저를 이용해 경고나 교체 등 경기 상황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AFC 본부에 알려주면, AFC 본부가 다시 대한축구협회에 통보했고, 협회는 이를 소셜미디어를 통해 팬들에게 전달했다. 이 복잡한 과정을 두고 "사상 초유의 다단계 문자 중계"란 반응까지 나왔다.

북한 선수가 경고를 받았다는 내용의 문자가 뜨자 일부 팬들은 혹시 한국 선수가 다치지나 않았을까 우려를 나타냈다. 큰 부상자 없이 경기가 0대0 무승부로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팬들도 있었다.

대표팀은 베이징을 경유해 인천공항엔 17일 오전 12시 45분 도착할 예정이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북한이 경기 영상 DVD를 우리가 출발하기 전에 준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경기 분석용인지 중계가 가능한 영상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장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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