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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SS창간특집 BK-빅초이 직설토크] ② "그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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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광주일고 출신 전 메이저리그 선수 김병현과 최희섭이 13일 광주 김병현이 개업한 햄버거집에서 스포츠서울창간 34주년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광주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광주=스포츠서울 장강훈기자] “이야~23년 만이네.”

불혹을 넘긴 두 남자가 까까머리 고교생 때 추억이 담긴 유니폼을 들어보며 환하게 웃었다. 작은체구의 형이 “얼마만이냐?”고 묻자 큰 몸집의 동생이 “형 고3때 이후니까 23년 됐죠”라며 웃었다. 광주일고 동문이자 함께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다 고향팀인 KBO리그 KIA에서 유니폼을 벗은 김병현과 최희섭(이상 40)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과 같은 길을 걷다가 홀로 현역 코치로 현장에 머물고 있는 서재응(42·KIA) 코치도 함께 할 계획이었지만 ‘직장인’의 현실을 반영하듯 급한 업무가 생겨 함께하지 못했다. 스포츠서울 34주년을 맞아 ‘코리안 메이저리거의 산실’ 광주 제일고 출신의 1세대 빅리거 김병현, 최희섭 듀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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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고 시절 김병현. (스포츠서울DB)


◇처음 공개하는 BK의 빅리그 도전 계기
학창시절 얘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최희섭이 소름돋는 얘기를 들려줬다. 정작 김병현은 “내가 그랬나?”라며 처음듣는 듯 한 표정을 짓더니 “아, 그랬던 것 같다”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남다른 기억력을 과시하는 ‘빅초이’ 답게 내용이 꽤 구체적이었다.

때는 제33회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1998년 7월)를 앞두고 미국에서 치른 한미야구선수권대회 전지훈련 기간이었다. 당시 성균관대 2학년이던 김병현과 고려대 신입생이던 최희섭이 나란히 대표팀에 뽑혀 미국 플로리다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였다. 최희섭은 당시 룸메이트이기도 했던 ‘절친’ 김병현이 뉴욕 메츠와 평가전을 앞두고 “(최)희섭아, 오늘 나 정말 잘 던져서 메이저리그에 갈거다. 두고봐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최희섭은 “(김)병현이 형은 어릴 때부터 한 번 뱉은 말은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 목표를 설정하면 반드시 이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귀띔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포심 패스트볼 구속이 평균 142㎞ 남짓에 불과하던 김병현은 메츠와 평가전에서 선발로 나서 150㎞를 웃도는 강속구를 연신 뿌려댔다. 서재응이 메츠의 루키로 입단했던 때였고 ‘광주일고 삼총사’가 미국땅에서 처음 한 자리에 모인 날이기도 했다.

김병현은 최희섭을 향해 “내가 진짜 그랬어?”라며 껄껄 웃더니 “그 때 왜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서)재응이 형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해태 입단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서)재응이 형이 새로운 길을 뚫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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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포토데이에서 김병현(야구선수,앞쪽)과 랜디 존슨. 강영조기자 kanjo@sportsseoul.com


◇발렌타인 감독 앞에서 거둔 첫 세이브
소름끼치는 사실은 김병현이 바로 메츠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데뷔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한미야구선수권대회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한 김병현은 그해 12월 방콕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안게임에서도 중국과 준결승에 구원등판해 8연속타자 삼진을 비롯해 6이닝 퍼펙트 투구로 일약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의 집중 관심을 받았다. 이미 박찬호(당시 LA다저스), 김선우(몬트리올), 서재응(뉴욕메츠) 등 한국인 빅리거 열풍이 불기 시작할 때라 생소한 잠수함 투수인 김병현의 희소성에 수 많은 팀이 러브콜을 보냈다. 김병현은 “메츠전에서 잘 던진 뒤 당시 사령탑이던 보비 발렌타인 감독이 ‘너 마음에 든다. 우리 팀에 와서 같이 하자’고 덕담을 건네더라. 아시안게임 이후 메츠와 시애틀, 애리조나 등이 적극적으로 영입 제의를 했는데 애리조나가 가장 많은 금액을 썼다. 당시 에이전트가 ‘신생팀이라 적응하기도 편할 것’이라고 말해 두 말 없이 애리조나와 계약했다”고 돌아봤다. 당시 김병현이 받은 계약금 225만 달러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한국인 계약금 최고액(아마추어 기준)이다.

실제로 김병현은 1998년 5월 30일 메츠와 원정경기에 8-7로 앞선 9회말 마운드에 올라 에두아르도 알폰소-존 올러루드-마이크 피아자를 공 17개로 처리하며 한국인 메이저리거 첫 세이브를 따냈다. 특히 피아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주먹을 불끈 쥐며 하늘로 뻗어 BK(Born to K)의 탄생을 알렸다. 김병현은 “경기 전 선수 소개 때 발렌타인 감독이 ‘잘지냈어?’라며 거수경례를 하길래 웃으며 같이 경례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애리조나 입단 후에도 발렌타인 감독이 ‘너랑 꼭 같이 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애리조나에서도 잘 하라’고 덕담을 건네 특별한 인상을 갖고 있다”며 웃었다.

최희섭은 “그렇게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형이 메츠를 상대로 첫 세이브를 따냈다. 그 장면을 TV 중계로 지켜보는데 1998년 그 때 일이 생각나 소름이 돋았다. 와, 이 형이 또 이렇게 해내는 구나 싶었다. 이 때 ‘나도 메이저리그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고 돌아봤다. 동고동락한 형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자리잡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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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초이’ 최희섭은 초등학교 때부터 남다른 발육으로 눈길을 끌었다. 광주일고 시절 최희섭. (스포츠서울 DB)


◇코치인줄 알고 인사했던 ‘사기캐’ 빅초이
김병현은 최희섭과 첫 만남을 잊지 못했다. 수창초등학교 6학년 때 당시 5학년이던 최희섭이 야구를 하겠다고 전학을 왔다. 김병현은 “모여서 훈련을 하고 있는데 키 큰 남자가 감독님과 함께 오길래 새 코치님이 오시는줄 알았다. 그래서 인사를 꾸벅했다”며 최희섭을 바라봤다. ‘빅초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남다른 체격을 자랑했다. 김병현은 “전학을 오자마자 타격을 해보겠다더라. 그래서 6학년 친구가 공을 던졌는데”라며 갑자기 최희섭을 쳐다보며 껄껄 웃었다. 초등학생은 상상도 할 수 없던, 학교 건물을 넘겨버리는 대형 홈런을 쏘아 올렸기 때문이다. 최희섭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던 김병현은 무릎을 탁 치며 “동대문구장에서 잊지 못할 그림 하나가 있다”며 한 가지 에피소드를 더 들려줬다.

김병현이 대학교 1학년 때 광주일고가 전국대회를 위해 동대문 구장에 입성했다. 모처럼 후배들 얼굴이나 볼 겸 동대문 구장을 찾은 김병현은 “해가 뉘엿 뉘엿 넘어갈 즈음이라 구장 분위기 자체도 만화 같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동대문 구장은 우측 관중석 뒤로 해가 넘어가 노을이 절경을 이루는 구조였다. 김병현은 “1997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최)희섭이가 타석에 들어서니 2루수가 우익수 앞으로, 1루수도 뒤로 한참 물러나 있더라. 속으로 ‘무슨 저런 수비가 있나’ 싶었는데 희섭이가 타격을 했다”며 또 웃음을 터트렸다. 동체시력이 좋은 편이라 눈으로 타구를 쫓는데 어려움이 없던 김병현도 고개가 순간적으로 돌아갈만큼 총알 타구였다. 뒤로 물러나있던 2루수가 있는 힘껏 점프를 할 정도로 날카로운 라인드라이브 타구였는데, 이게 관중석 중단에 그대로 꽂혀버렸다. 너털웃음을 짓던 김병현은 “거짓말 같지만 진짜다. 태어나서 그렇게 빠른 타구가 그렇게 낮은 탄도로 출발해 관중석에 꽂히는 장면을 처음 봤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지금 생각하면 희섭이 같은 애가 알루미늄 배트로 타격한다는 것 자체가 반칙”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기 캐릭터’였던 최희섭이 ‘투수 모자 챙을 스치듯 날아간 타구가 백스크린을 넘기더라’는 류의 동대문구장 홈런 전설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셈이다. 최희섭은 “덕분에 대학교 1학년 때 성인 대표팀에 뽑힐 수 있었다”며 쑥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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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고에서 동고동락한 둘은 성인이 된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재회한다. 2003년 시카고 컵스와 애리조나의 시범경기, 김병현과 최희섭의 대결은 내야땅볼과 데드 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집념의 BK, 분루를 완봉으로 갚다
23년 만에 모교 유니폼을 입은 김병현은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늘 ‘내 뒤에 동료들이 있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게 광주일고의 힘이었고 그 시절 우리 야구의 낭만이었다”고 말했다. 서재응, 김상훈 등이 3학년으로 팀을 이끌고 김병현이 2학년으로 중심을 잡아주니 1학년 최희섭이 그의 친구들과 고교 무대를 평정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김병현은 “(서)재응이 형은 후배들을 편하게 해주는 선배였다. (최)희섭이는 투수들이 조금 부진해도 타력으로 경기를 뒤집는 힘이 있었다. 혼자가 아닌 팀으로 야구했던 때가 그립다. 요즘은 이런 모습이 없다”고 말했다.

얘기를 듣던 최희섭은 “병현이 형이 3학년 때 청룡기 대회에 팔이 아파 출전을 못했다. 투수 경험이 없는 내가 마운드에 오를 정도였다. 그 때 억울해서 울었던 형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졸업반이면서도 후배들에게 우승 전통을 이어주고 싶었던 김병현의 꿈이 처음으로 좌절된 순간이기도 했다. 최희섭은 “그 때도 형은 하루도 빠짐 없이 푸시업 1000개씩을 했다. 자신에게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던 성격 탓에 부상으로 대회 출전이 무산된 게 억울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당시 팀의 완패를 지켜보던 김병현은 ‘졸업 전에 반드시 우승컵을 안기겠다’고 다짐했고 그해 강원도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결승전 완봉으로 기어코 목표를 이뤘다. 김병현은 “전국체전을 벼르고 있었다. 한 번은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승부가 일찌감치 갈려 감독님께서 ‘그만 던질래?’라고 물으시길래 후배들에게 선물하나는 주고 싶으니 끝까지 던지겠다고 말씀드렸다. 삼진 16개를 잡아내면서 완봉승을 했다”고 돌아봤다. 이 장면이 떠오르는 듯 눈을 마주친 둘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들은 “은퇴하고 나니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 돌아간다면 몸관리부터 식습관까지 완전히 바꿀 것”이라며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zzang@sportsseoul.com
<③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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